시선뉴스=조재휘 기자 / 디자인=이윤아Proㅣ지난 3일 제75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제주4·3평화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추념식은 4·3 정신을 담아 ‘제주 4·3, 견뎌냈으니 / 75년, 딛고 섰노라’를 슬로건으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그런데 당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던 ‘서북청년단’의 이름을 단 단체가 4·3평화공원에서 집회를 열겠다며 회원 3명이 4·3평화공원을 찾았다.

‘서북청년단’은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다.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정치적 기득권을 잃고 남하한 지주 집안 출신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서북청년단의 성격은 철저한 극우단체로서 우익의 선봉에 서서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전위 행동부대로서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1947년 3·1절 기념식 후 시가행진을 하던 시민들을 구타한 ‘남대문충돌사건’을 비롯해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 세력에 대항하는 테러를 전개했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러한 서청을 ‘백색 테러단’으로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 제재를 가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좌우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익 정치인과 친일 기업가들에게서 자금을 받으면서 좌익 계열 단체의 사무실이나 신문사에 대한 습격을 비롯해 좌익계열 노동운동이 활발한 회사에 회원을 입사시켜 노동운동을 파괴하기도 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도 서북청년단 간부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9월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를 둘러싸고 서청은 2갈래로 분열되었다. 대동청년단에 합류하지 않은 후기의 서청을 초기 서청과 비교해서 ‘재건 서청’이라 부르게 되었다. 초기 서청은 김구와 김규식 노선을 지지했지만 재건 서청은 이승만의 단정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재건 서청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통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지난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강 모 씨(77)는 봉안실 내 위패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한을 토해냈다. 강 씨는 “4·3 당시 토벌대가 동네 주민 중 젊은이들만 가려내 서귀포시 모슬포 주둔지로 끌고 갔는데 그때 아버지도 잡혀갔다며 그리고 얼마 안 돼 모슬봉에서 집단학살 당했다”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당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던 서북청년단의 이름을 단 단체가 감히 희생자 영령을 모신 평화공원에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자칭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라는 단체는 이날 4·3평화공원에서 집회를 열겠다며 회원 3명이 4·3 평화공원을 찾았다. 이들은 이날 오전 집회 준비를 위해 차량에서 내리려고 하자 도내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이를 막아섰고, 경찰은 충돌을 막기 위해 이들 단체를 격리 조치했다.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 ‘서북청년단’.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서북청년단’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제시돼 있는 바와 같이 4·3 발발 전부터 제주도민과 갈등을 빚어 4·3발생의 한 원인이자 무고한 민간인의 대량 학살을 자행한 주범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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