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좌), 무소속 안철수 후보(중),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우)

프랑스의 시인이자 우화작가였던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은 “인간은 진실에 대해서는 얼음처럼 차갑지만, 허위에 대해서는 불처럼 뜨겁다.”라고 설파했다. 그래서 인간세계에서는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거나 그 경계가 흐릿한 것이 다반사이다. 더욱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선거에 있어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허위인지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선거에서는 무차별적인 선전·선동이 난무한다.

금년 대통령 선거 역시 네거티브 캠페인을 넘어 진실 게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흑색선전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예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수록 진실을 허위로, 허위를 진실인 양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마술이나 성동격서(聲東擊西)란 전술 말이다.

어제(24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김무성 총괄본부장은 안철수 후보를 정면 공격했다. 김 본부장은 “안 후보가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복지 확충 재원에 대해 ‘능력대로 내고 필요한 만큼 쓰자.’는 식의 대답을 했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사용한 슬로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 본부장은 “안 후보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덧붙였다.

안철수 후보의 표현이 적절했는지는 얼마든지 따져볼 수 있다. 하지만 안 후보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다. 안 후보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기업을 일구어 온 사람으로서 마르크스주의자일 리가 없다. 안 후보의 말은 ‘계층에 따라 세금 부담을 달리 하고, 복지 혜택 또한 그렇게 하자’는 취지로 해석된다. 후자는 복지사회를 지향하더라도 과도한 복지 예산의 지출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계층별 세금 부담의 차별화는 보편적인 일이다. 특정 계층에 대한 지나친 담세는 조세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합당하다. 또 복지 혜택의 차등화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것이 옳은 방향이기도 하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력갱생을 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을 구분하지 않은 채 획일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김무성 본부장의 발언과 관련되는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논지(論旨)는 이렇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제2단계, 즉 공산주의 단계가 되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가 없어지며,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유토피아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주의자조차도 요즘은 이 백일몽(白日夢)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마르크스의 논지와 안철수 후보의 주장을 서로 비교하면, 표현이 비슷한지는 몰라도 문맥은 전혀 다름을 금방 알 수 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새누리당은 지금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모면하고자 상대 후보에 대해 근거가 희박한 악선전을 하거나 약점을 침소봉대하는 방향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다. 그 답답한 심정은 일면 이해가 되지만, 이런 식의 캠페인은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만큼 세상이 바뀌었고, 국민들의 수준이 높다는 걸 새누리당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새누리당이 안철수 후보를 마르크스와 연결시킨다고 해서 어느 국민이 안 후보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은 새누리당이 색깔 공세를 펴고 있다고 폄하하고 있을지 모른다. 또 자충수를 두고 있는 새누리당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 같다. 이미 매카시즘이 통용되는 시점은 지났다. 우리 국민들은 낡은 이념에 빠져 있는 진보 일각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새누리당의 극우적 발상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안철수 현상’이 왜 발생했는가? 새누리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의 낡은 요소들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임계점(臨界點)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 후보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오히려 안 후보의 존재가치를 더 키워주고, 반대로 기존 정당들이 안 후보의 말대로 ‘낡은 체제’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말하자면 구태의연한 캠페인이 지속될수록 안 후보의 입지는 더 넓어진다는 뜻이다.

새누리당이 안철수 후보에 대해 이념 공세를 펼치는 이유는 안철수 후보가 복지 포퓰리즘에 경도되어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물론, 재원 대책이 없는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더욱이 새누리당 스스로 대학생 반값 등록금 등 포퓰리즘 성격의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심각한 자가당착이다.

법정(法頂) 스님은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선거에서 거친 말이 쉽게 오고가는 현실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선거전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대통령 선거 풍토를 더 없이 오염시키고 있다.

정치 지도자는 말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줄 수 있다. 이것이 어쩌면 정치 지도자의 중요한 책무인지 모른다. 반면에 정치 지도자가 실언이나 망언을 할 때에 국민들이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클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설화(舌禍)는 끊이지 않고 있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정치 지도자일수록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욱이 지금은 모든 정보가 노출되는 시대가 아닌가!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선진국의 정치에서도 정쟁(政爭)이 벌어진다. 또 선거 때마다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 나라 정치인들은 대체로 격조 높은 논쟁을 벌이는 걸 우리는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하고 있다. 말의 품격을 잃게 되면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치 무대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음을 그들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정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말부터 선진화되어야 한다.

말이란 전염성이 강하다. 지도자의 말은 더 그렇다. 지도자의 말이 어떠한가에 따라 국민들에게 주는 파장이 지대한 것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이들은 언어폭력이 심각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환경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현실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요즘 대통령 후보들은 각각 정치 개혁에 관한 공약들을 발표하고 있다. 후보들의 정치 개혁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후보와 그 측근들이 품격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출마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다른 리더십의 덕목은 몰라도 최소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만큼, 그 참모들 또한 후보의 이미지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자중자애하기를 바란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bich Tolstoy)는 “자신의 결점을 반성하는 사람은 타인의 결점을 캐낼 틈이 없다.”라고 일갈했다. 불리한 판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 방’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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