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한 나라의 진정한 부(富)의 원천은 그 나라 국민들의 창의적 상상력에 있다.”고 말했다. 300년 훨씬 전인 18세기에 했던 말인데, 애덤 스미스의 선견지명이 뛰어나다고 하겠다. 이 금언이야 동서고금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과 같은 지식정보 시대에 딱 들어맞는 가르침이 아닐까?

필자는 누차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중진국의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시대 미국의 우산이었던 데다 우리 국민 특유의 근면성, 국가 주도의 발전 전략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하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 전반의 혁신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중대한 계기였다. 우선,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은 시점이 되었다. 개발 시절 관행이었던 정경유착 또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외환위기 당시에 우리는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성장만으로는 우리 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대한민국의 질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의성이 밑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진단들이 도처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식정보 시대인 데다, 자원이 빈곤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 원천이 창의성이라는 얘기였다. 지당한 방향이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 들어선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는 나름대로는 이런 방향으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본질을 통찰하지는 못했고, 알았다 하더라도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의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어떤가? 교육의 양적 확대는 엄청나게 이루어졌지만,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획일적인 산업 인력들을 대거 배출해야만 했던 제2물결 시대의 교육 패러다임을 온존시키고 있는 꼴이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말한 제2물결 시대의 특성이 무엇인가? ① 표준화 ② 전문화 ③ 동시화 ④ 집중화 ⑤ 극대화 ⑥ 중앙집권화가 그것이다. 작금의 우리 교육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관료와 보수적인 이데올로그들은 ‘경쟁력=수월성 교육’이란 관념에 깊이 빠져 있다. 주입식의 획일적 교육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낡은 교육 방식을 오히려 확대,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 현장을 망치고 우리 아이들을 불행에 빠트리는 ‘선행(先行) 학습’이 수월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진도보다 1~2년 후의 과정을 미리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선행 학습이 유행하다 보니, 공교육은 무너지고 학원이 그 기능을 대체한 지 이미 오래 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이름뿐인 수월성 교육이다. 즉 ‘생각하는 교육’ ‘의문을 던지는 교육’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교육’일 뿐이다. 이 ‘정답 찾기 기계’를 만드는 교육으로 어찌 수월성이 키워지겠는가? 이런 식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학생들이 과연 글로벌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요컨대 상상력과 창의성을 죽이는 교육으로 선진국이 되겠다는 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가정경제를 파탄시킬 정도의 많은 비용을 들이고, 아이들의 자부심마저 해치며, 창의력의 원천마저 고갈시키는 이런 교육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물론, 수십 년 계속되어 온 이 낡은 교육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육 관료들의 책임이 크지만, 학부모의 왜곡된 욕구, 우리 사회 전반의 잘못된 인식까지 겹쳐 있다. 무엇보다도 사교육 시장이라는 기득권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과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물론, 이 일은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그 개선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창의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바꾸는 일 못지않게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창의성으로 넘쳐나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지식정보 시대의 역설’ 현상을 심히 겪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독서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대한민국에서 스마트 폰이 나온 이후로는 그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지하철을 타 보라. 지하철 안에서 책 읽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들조차도 그렇다. 스마트폰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지식과 정보의 습득조차도 관성적이고 즉자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성찰력이 발휘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컴퓨터 황제인 빌 게이츠(Bill Gates)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식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지식정보 시대일수록 지식과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바꾸어 말해 지식정보 시대일수록 성찰력이 중요한 덕목이며, 그것은 독서력이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빌 게이츠는 이런 말도 남겼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대학 졸업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다.”

혹자는 말한다. 지식정보 시대에서는 전 국민의 1~2퍼센트만이 창의적인 일을 하고, 나머지 국민은 지식과 정보를 소비할 뿐이라고. 설령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 1~2퍼센트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학업 성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 언제든지 1~2퍼센트에 들어갈 수 있다. 창의적인 환경이라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1~2퍼센트가 아니라 10퍼센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광고 전문가였던 윌리엄 번바흐(William Bernbach)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씨앗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토양이 필요하다. 좋은 생각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지식정보화 시대에 맞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을 지식정보화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정보화가 곧 정보화 기기의 노예인 양 인식되고 있는 현실로는 참다운 의미의 지식정보 국가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진적인 문명국가로 후퇴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이런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후보 스스로 ‘제3물결형 지도자’로 거듭나야 한다. 제3물결에 맞는 가치관, 행동양식, 리더십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그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오피니언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 시선뉴스의 공식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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