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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백제는 위로는 고구려, 아래로는 신라의 압박을 계속 받은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유역을 필두로 백제는 고대 삼국 중 가장 빠르게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그 전성기를 이끈 왕이 바로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346~375)은 백제의 제13대 왕으로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을 도읍으로 하여 백제의 전성기를 불러일으킨 업적을 남긴 왕으로 백제 11대 비류왕(比流王, 304~344)의 둘째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근초고왕에 대해 “체격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식견이 넓었다”며 그 풍모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즉위 후 신라와는 화평을 맺고 고구려와는 적대하는 정책을 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368년(근초고왕 23년)신라에 좋은 말 두 필과 함께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제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고구려와는 그러지 못했는데, 신라와 화평을 맺은 이듬해 가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雉壤, 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침공해 왔다. 이에 근초고왕은 태자에게 병력을 이끌고 고국원왕을 공격케 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371년(근초고왕 26)에는 한번 패배했던 고구려가 재침공 해오자 백제는 패하(浿河:예성강)인근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3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총 공격하여 결국 침략자인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군사국가인 고구려로서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치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고 백제로서는 최고의 전공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 뒤 고국천왕은 한강에 접한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겨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전부와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하게 됐다.

근초고왕은 372년 중국의 동진(東晋, 317∼420)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백제의 사적을 정리하여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했다. 또한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를 왜로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한 경(經)과 사(史)를 전해주는 등 고대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도 했다.

375년(근초고왕 30)가을, 고구려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이에 근초고왕이 군대를 일으켜 막게 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근초고왕은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에 보복하려 했지만, 극심한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고 결국 그해 겨울에 사망했다.

백제가 전성기에 차지했던 영토는 고구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선택과 집중을 매우 잘 한 왕으로서, 고구려에게는 강경책을, 신라에게는 유화책을 써 국가 안정과 부흥을 일으켰고, 이 효율성으로 고구려의 땅까지 빼앗는 대승까지 맛보았다. 또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왜에 전파 하는 등 문화 사절단으로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낸 왕이었다.

고구려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눌리는 형국인 백제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이겼던 시기는 근초고왕의 시대뿐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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