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허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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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영원히 흙 속에 묻힐 뻔했던 신라, 백제, 가야의 찬란한 유물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화재 발굴 덕분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은 문화재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인데요. 국내에서는 지난 1946년 5월 경주 호우총을 시작으로 1960년대 이후 본격화하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땅속의 문화재가 세상에 빛을 보는, 오늘은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 역사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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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발굴된 백제 제25대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백제 제6호 고분의 배수시설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됩니다. 역사적인 발굴이었죠. 무덤 앞의 지석에는 묻힌 왕과 왕비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이로써 이 무덤은 유일하게 연대와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왕릉으로 기록됩니다. 또 부장품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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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나라의 상호 간에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문화재 조사·발굴은 경주관광개발 종합계획에 따라 활발히 추진됐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가 발굴됩니다. 1959년 실시된 감은사터 발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절터 발굴조사였는데요. 절터 내 3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우리 손으로 찾아낸 최초의 신라시대 ‘사리장엄구’이기도 합니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해 조형미와 조각미가 뛰어나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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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문화재 발굴은 계속됩니다. 1971년 경주관광개발 종합계획에 따라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황남대총(제98호분), 천마총(제155호분), 황룡사터, 안압지 등이 연이어 발굴됐고, 황남대총과 마주 보고 있는 제155호분에서는 신라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천마도가 발견됩니다. 이 때문에 고분 이름은 천마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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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에 걸친 발굴 작업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당시 동양 최대의 절이자, 최고(最高)의 9층 목탑이었음이 밝혀집니다. 또 안압지 역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곳 중 하나인데요. 준설작업을 위해 연못의 물을 빼는 과정에서 못 바닥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이로 인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어 1991년, 금관가야 수장층의 공동묘지로 알려진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파형동기, 청동 항아리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됩니다. 가야의 유물 발굴을 통해 가야가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1992년 경남 함안군에서 발굴된 대형 가야고분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한 형태를 갖춘 말 갑옷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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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연천 전곡리의 전기 구석기 유적 발굴을 통해서는 20만 년 전에도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의 발굴은 어떠한 이유에서 행하여지건 학술적인 연구와 조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굴에 앞서 주무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발굴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땅 속에는 빛을 보지 못한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지금도 옛것의 흔적 찾는 작업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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