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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인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17대, 율령반포)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기 시작한 정복 군주다. 광개토 대왕은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광개토 대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 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룩해 내었고 이를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으로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즉위를 하자마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승전보를 울렸다. 이 때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했다.

광개토대왕의 중요한 업적 중 400년에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백제와 왜, 가야의 연합군을 격퇴시킨바가 있다.

고구려는 이런 신라를 도와,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신라 내물왕에게 의복을 내려 고구려의 강성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국외 정복 활동으로는 연(燕)나라의 모용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빼앗았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는 저력을 보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했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 64성을 함락시켜 동부여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또한 지속적인 남하정책으로 한강 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 만주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삼국사기에는 413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412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광개토 대왕의 능의 정확한 소재는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업적이 남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의 안정화에 힘입어 엄청난 군사력으로 가장 활발한 정복 활동이 이루어 졌던 시기다. 광활한 만주 영토를 고구려의 땅으로 만들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중국과의 대등함을 보였던 때였다.

우리로서는 자주성과 더불어 국력의 강력함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였고, 반대로 중국에는 치욕적인 과거일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고구려 역시 중국의 한 지방 국가로 만들기 위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안내문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내용이 한글로 설명이 되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중국의 움직임에 우리나라는 아직 별다를 대응을 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강건함을 가장 크게 보여줬던 왕 중의 왕 광개토대왕.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빼앗기지 않게 역사적 자부심을 크게 갖고 동북공정에 맞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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