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한국 영화 격변기였던 1980∼90년대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계의 '큰 어른'으로 불렸던 태흥영화사 ‘이태원’ 전 대표가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태흥영화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표는 이날 오후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해 5월 낙상사고를 당한 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약 1년 7개월간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한국영화 거목 이태원씨 별세 [연합뉴스 제공]

고인은 생전 태흥영화사를 설립하고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춘향뎐' 등을 제작해 한국 영화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故 이태원 전 대표는 1938년 평양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때 피란 과정에서 가족과 떨어지면서 숱한 어려움 속에 성장했다. 중학교 졸업 후 부산에서 상경한 뒤에는 한때 '조직'에 몸담기도 했다. 그러다 1959년 우연히 만난 무역업자가 영화제작을 권유하면서 고인의 첫 영화 '유정천리'가 탄생했으나 당시 '정치깡패'였던 임화수의 영화에 밀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20∼30대 시절 군납과 건설 관련 일을 하던 고인은 1973년 인수한 의정부 소재 빌딩의 극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고 경기, 강원 지역의 영화 배급을 시작했다. 이후 1984년 부도 직전의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를 설립하며 20년 만에 영화제작자로 다시 나서게 됐다. 이때 임권택 감독과 '비구니'로 처음 만나게 됐지만, 당시 불교계 반발로 영화 개봉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때 만난 임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과는 평생의 트리오로 활약하며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여럿 남겼다. 특히 임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하다시피 했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나란히 앉은 이태원 태흥영화사 설립자 [연합뉴스 제공]

고인은 1985년 작품 '무릎과 무릎 사이', '뽕', '어우동' 등 에로티시즘 영화를 잇달아 히트시켜 재기에 성공했고, 1989년부터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거물 제작자로 거듭났다.

고인은 영화계에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녹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주연배우 강수연이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장군의 아들'(1990년작)과 '서편제'(1993년작)는 각각 서울 관객 68만 명, 10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임 감독과 꾸준히 호흡을 맞춘 고인은 '춘향뎐'으로 칸 영화제에 처음 입성했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오르는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조승우 주연 '하류인생'(2004년작)이 고인과 임 감독이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하류인생'은 고인이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녹여 만든 영화로, 제61회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등 작품성에서 호평 받았다.

 2002년 7월 8일 당시 남궁진(南宮鎭)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문화공로 수훈한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오른쪽)와 임권택 감독 [연합뉴스 제공]

그렇게 총 37편의 영화를 제작한 고인은 한국 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1993년), 은관문화훈장(2003년),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제작자상,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등 각종 훈장과 상을 받았다. 그리고 故 이태원 전 대표는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의정부 소재 '태흥시네마'를 확대 운영했으며 태흥영화사가 보유한 저작권을 관리하면서 노후를 보냈다.

2004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흥행물도 나와야 하지만 그것만 하면 영화는 없어진다. 작품성, 예술성 있는 게 나와야 한다"며 한국영화를 향해 애정 어린 조언을 남기기도 한 영화계 ‘큰 어른’ 故 이태원 전 대표. 고인의 빈소에 생전 신현준, 최민식, 조승우 등 고인과 연을 맺었던 영화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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