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임수현 수습]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의를 기리는 ‘충무공 탄신일’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돌아보자.

충무공 탄신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1545년 4월 28일을 기념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조선 정조 때부터 기념행사로 기려왔고, 이후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지는 듯 했으나 광복 이후 다시 살아나 196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본격적인 기념일로 행사를 치러 왔다. 

이후 기념일의 성격만 유지해 오다가 1998년 충무공 순국 400돌을 맞으면서 다시 기념사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기념일 행사는 국방부가 주관, 주요행사는 해군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는데, 해군은 행사 당일 기항 중인 함정마다 만항식을 거행해 성웅(聖雄)의 탄생을 경축하는 등 충무공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충무공 이순신 그는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조선시대의 장군으로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들어섰다. 1572년(선조5)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9)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지금으로 치면 7전8기 끝에 늦은 나이에 관직에 들어선 것. 하지만 관직에 들어선 후 역시 그는 다양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백의종군(白衣從軍), 흰 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아무런 직책 없이 열심히 일을 할 때 쓰는 말이다. 즉 자신의 계급, 권한을 모두 내놓고 가장 아래로 내려가서 전쟁터에 나간다는 뜻을 지녔다. 

이순신 장군은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하지만 이듬해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를 빗대어 자신의 계급과 권한을 모두 내려놓고 뒤에 서서 묵묵히 따르는 정치적 행보를 일컬어 백의종군이라 비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지만, 장군으로서의 신념과 신의, 애국을 잃지 않았던 이순신은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1591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해 왜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그의 준비 덕분에 잇따라 승전보를 울리게 된다. 

특히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공을 세웠는데,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등에서 왜선을 크게 격파해 승리했고, 이 일을 계기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의 공은 계속 되었다. 특히 사천해전에서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는데, 이때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어 큰 기여를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공은 전라도에서 빛을 발휘한다. 이순신 장군의 맹공에 연이어 패배를 한 왜군은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침략하려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척의 왜군을 물리쳤고, 이것이 바로 한산도대첩이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손에 넣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순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다.

특히 영화로도 제작되어 화제가 된 ‘명량해전’의 경우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명량대첩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학했고,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처럼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게 한 이순신 장군은 1598년 노량대첩에서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전사 했다. 당시 자신의 목숨보다 군사들의 사기 저하를 염려했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의 공을 기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1643년(인조21)에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그리고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또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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