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세계문화유산 이화원의 주인 ‘서태후’...혈육도 안중에 없던 야욕
[카드뉴스] 세계문화유산 이화원의 주인 ‘서태후’...혈육도 안중에 없던 야욕
  • 보도본부 | 심재민 기자
  • 승인 2021.03.1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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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중국 베이징 여행 코스 중 하나인 ‘이화원’. 천안문 북서쪽으로 19km 떨어진 이곳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공원으로 전각과 탑, 정자, 누각 등이 위치한 청나라 황실의 여름 별궁이었다. 그런데 면적이 290헥타르에 달하고 바다와도 같은 인공 호수를 품었으며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이화원은 청나라의 최고 권력자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바로 서태후(자희황태후)다. 

서태후는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재위 1850~1861)의 후궁으로, 권세욕과 사치가 매우 심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권세욕과 사치가 심했던 이유는 어릴 적 ‘가난’ 때문이다.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난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꿈은 오직 하나 ‘출세’였고 그 방법으로 ‘궁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851년 16세의 나이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자금성에 들어가 더 높은 출세를 꿈꾸기 시작했다. 권세욕에 가득 찬 서태후의 무기는 젊음, 미모, 그리고 뛰어난 말솜씨였다. 

그런 서태후의 등장은 자금성 내에서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 함풍제 주변의 환관들에게까지 전해졌고 마침내 서태후는 함풍제의 관심을 얻는데 성공해냈다. 하늘마저 그녀의 편이었을까? 서태후는 함풍제의 유일한 혈욱을 출산하게 되었다. 그것도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었다. 

‘가난’에 복수를 하듯 서태후는 귀비로 오른 자신의 권력을 서서히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황제인 함품제의 정사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함풍제는 그녀의 멈출 줄 모르는 권세욕과 야망을 서서히 경계했고, 암살할 계획도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또 하늘은 서태후의 편이었을까?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침략과 피난과정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된 함풍제는 1860년 31살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만다. 유일한 혈욱 6살 난 황태자와 황태자의 어머니인 ‘서태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황제. 그렇다! 청나라는 서태후의 세상이 된 것이다.

아들이 비어있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정사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가난’에 대한 복수와 사치는 본격화 했다. 물론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도 있었지만 그녀는 문맹으로 알려졌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주관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실세를 잡은 서태후, 그녀의 본명보다 잘 알려진 서태후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런 서태후에게 가장 큰 경쟁자는 누구였을까? 맞다. 자신의 아들이자 황제인 ‘동치제’였다. 서태후는 어린 동치제가 성장하고, 직접 정사를 하게 되면 자신의 권력을 줄어들 것을 크게 염려했다. 서태후의 눈에 아들 ‘동치제’는 서서히 눈엣가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서태후는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따르는 동치제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혈육을 제거하기 위한 모략을 짜기에 이르렀다. 어린 황제와 명문가 출신의 황후를 갈라놓고 구박했으며 심지어 환관을 사주해 아들 동치제를 환락에 빠져들게 했다. 그렇게 결국 스트레스에 시달린 동치제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고, 서태후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을 막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또한 아이를 가진 며느리 황후에게마저 온갖 구박을 퍼부었고, 끝내 황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또 다시 빈 황제의 자리.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과 야욕을 더욱 키워나갔다. 그리고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출생한 ‘광서제’를 선택했다. 이때 광서제의 나이는 겨우 4살.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통한 정치와 야욕은 그칠 줄 몰랐다. 자신의 친 아들마저 목숨을 잃게한 서태후를 너무나 잘 안 광서제는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후도 서태후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들였으며 1889년 서태후의 계획적인 친정 선포와 함께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이어갔다. 

친정 선포와 함께 서태후는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서태후는 모든 국정을 보고받고 지시했으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치를 이어갔다. 그녀가 머무른 이화원 역시 전쟁 중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만든 곳이었으며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이화원에 인력으로 파낸 바다 같은 호수까지 만들게 된다. 

그렇게 서태후의 출세욕과 야망, 사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화원. 이 뿐만 아니라 서태후는 한 끼에 중국 농민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돈을 사용하였고, 옷은 3000 상자 이상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으며 특히 보석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 그녀의 옷차림은 화려함의 극치였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말, 강국이었던 청나라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모든 권력을 장악한 서태후. 그녀는 당시 무려 47년간 통치자로 머물며 자신의 어렸을 적 ‘가난’에 복수하듯 권력과 사치를 즐겼다. 그리고 이를 여실히 말해주는 세계문화유산 ‘이화원’은 서태후의 과거를 잔잔히 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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