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윤수 pro]

▶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 출생-사망 / 1797. 08. 30. ~ 1851. 02. 01.
▶ 국적 / 영국
▶ 활동 분야 /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전기 작가 등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수필가, 전기 작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세계 최초의 SF 소설가로 알려진 ‘메리 셸리’. 그녀의 어머니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이기도 하다. 

문학소녀로서의 성장
메리 셸리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의 손에서 자랐다. 정식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많은 문인과 교류하며 글쓰기가 취미인 문학소녀로 성장했다. 그러던 메리는 15세에 아버지의 제자 중 ‘퍼시 비시 셸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연애를 시작한다. 문제는 퍼시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었고 메리와 퍼시는 주변의 시선과 가족의 반대를 피해 유럽으로 떠났다.

부부가 된 메리와 퍼시
하지만 가난과 안정되지 못한 유랑생활이 이어졌고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밴 상태였지만 힘든 생활 속에서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1816년 말엽, 퍼시가 그의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메리와 혼인한다. 부부는 낭만주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을 만나게 되어 친해졌고 그해 여름 바이런의 제안으로 퍼시와 메리, 바이런과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와 심심풀이로 괴담을 창작해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소설 ‘프랑켄슈타인’
메리의 회고에 따르면 퍼시와 바이런은 일찌감치 나가떨어졌고 폴리도리는 끔찍한 생각을 내놓았지만 끝을 내지 못하는 결말을 냈다. 이때 메리는 시체를 모아 전기의 힘으로 되살린 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바이런은 메리에게 소설로 집필할 것을 권유했고 퍼시도 소설 집필 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2년 후 1818년, 당시 글쓰기는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메리는 익명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세상에 내놓았다.

긴 투병 생활로 눈을 감다
1822년 남편 퍼시는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며 익사했고 1년 뒤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퍼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고를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고 1831년 <프랑켄슈타인> 개정판을 내면서 자신이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의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다. 메리는 여생을 아이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하며 보냈지만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지루한 투병 생활을 하다 눈을 감는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평가
지금은 <프랑켄슈타인>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많은 희곡과 영화로 재구성되고 있지만 당시의 문학적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이 고전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60년대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고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 문학비평이 대두하면서부터이다. 

글쓰기가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던 때, 종종 작품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가정에서나 보여주던 협력과 조화로 시민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메리 셸리’. 그녀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작가로 평가받기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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