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 장원급제한 인재,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대학자 ‘율곡 이이’ [인포그래픽_인물편]
아홉 번 장원급제한 인재,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대학자 ‘율곡 이이’ [인포그래픽_인물편]
  • 보도본부 | 최윤수 수습
  • 승인 2021.01.1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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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윤수 수습]

▶ 이이
▶ 출생-사망 / 1536년(중종 31) ~ 1584년(선조 17)
▶ 시대 / 조선시대
▶ 활동분야 / 학자, 문신

신사임당의 아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율곡 이이는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문학적 소양에 뛰어나,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 대학자로 불렸다.

-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이

조선중기의 학자로 불리는 이이는 증좌찬성 이원수의 집안의 후손이다. 그는 강릉 외가였던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삼았다. 신사임당은 이이를 낳던 날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3~4세부터 글을 배웠다고 알려졌으며, 8세 때부터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서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기량이 돋보였다. 그리고 1548년(명종 3) 13세 때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 아홉 차례의 장원에 올라 ‘구도장원공’이라 불린 이이

그런데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사임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율곡은 3년간 어머니의 산소 여막에서 지내며 금강산 미하연으로 들어가 불교를 배웠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의 상심이 컸던 이이는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고 자신의 입지(立志)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이이는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다짐을 하며 평생 동안 이를 위한 뜻을 펼친다. 금강산에서 수양을 한 후, 그는 서울로 올라와 한성시(漢城試)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이후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하며 유능한 인재로 촉망받았다.

- 수많은 저서와 작품을 남긴 이이

이이는 29세였던 1564년에 정6품인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관직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며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고,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 대간(臺諫)의 직위를 맡으며 왕의 옆에서 정사를 도왔다. 그리고 1569년에는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 기사관까지 겸하면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왕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를 도왔지만 1574년(선조 7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이는 선조 임금의 지극한 존경을 받은 대학자로 꼽혔는데,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변화한다고 주장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理)와 기(氣)가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 학설을 내세웠다. 

- 후학양성에 힘쓴 이이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 양성에 힘을 쓰며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격몽요결’ 등을 편찬했다.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던 이이는 ‘성학집요’, ‘동호문답’, ‘경연일기’, ‘고산구곡가’ 등 수많은 저서와 작품을 남기며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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