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 청동기시대 국가 중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한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국가의 이름은 바로 ‘부여’, 이번시간은 ‘부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부여는 1세기 초에 이미 왕이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만주 길림시 일대와 쑹화강 유역의 평야지대에 형성되었다. 근접한 고구려와는 비슷한 풍습을 가지면서도 경쟁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였다.

부여는 왕이 있긴 했지만 왕권이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부여에는 4출도라 불리는 부족장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각각 마(말)가, 우(소)가, 저(돼지)가, 구(개)가라 불리던 이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했지만 농사가 잘 안 됐을 때는 그 책임을 왕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추궁(목을 베기도)하기도 했다.

이렇듯 왕이 존재하면 계급도 존재 하는 법. 부여의 계급 체계는 왕-가-호인-하호-노비의 순으로 계급이 존재했다. 전쟁이 나면 지배층인 제가들이 스스로 싸우고 피지배층인 하호는 식량을 나르는 일을 했다. 하호는 평민, 또는 농민의 위치로 생산력의 중심이었다.

 

부여는 위치 특성상 농경과 목축을 병행했다. 때문에 부여의 특산물은 농산물과 더불어 말, 주옥, 모피 등 이었고 이들이 부여의 무역경제에 큰 축을 차지했다.

또한 부여는 굉장히 엄격한 사회였는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 연좌제가 있을 정도였다. 또한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12배로 배상해야 하는 1책12법이 있었으며 간음한 자와 질투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는 등 남성 상위의 법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부여는 형사취수제가 있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풍속이 있었다. 동생이 죽자 약혼녀와 결혼을 하려는 영화 ‘가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부여에서는 아예 보편화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이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형’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동력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으로 시행됐다고 알려져 있다.

위와 같이 노동력을 중시여기는 풍습이 있었지만 모순되게도 왕이 죽었을 때에는 ‘순장’을 하는 풍습이 있기도 했다. 순장은 왕이 죽을 때 왕이 사용했던 물건과 함께 한 사람들을 같이 묻는 무덤양식이다. 죽어서까지 왕을 보필하라는 의미로 이 당시 사람들이 사후세계에 대한 의식을 깊게 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12월에는 영고라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사면해 주기도 했다. 이 때 부족장들은 중요한 회의를 하기도 하는 등 부족 간의 단결을 도모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들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고 고구려 문자왕(494년)에 고구려에 통합됨으로써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형제와도 같으면서 경쟁을 했던 부여. 비록 약한 왕권으로 연맹왕국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올곧고 강맹한 고구려의 큰 힘이 되어준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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