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최지민]

▶ 레니 리펜슈탈(Lenni Ridfenstahl)
▶ 출생-사망 / 1902년 8월 22일 ~ 2003년 9월 8일
▶ 국적 / 독일
▶ 활동분야 / 영화감독

베를린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하다 영화 제작에 관심을 보여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의 반열에 오른 레니 리펜슈탈은 탁월한 실력을 지닌 영화인이었지만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작품으로 후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팡크 감독의 작품으로 큰 영감을 받은 레니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무용에 관심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예술학교에 진학해 연기와 무용을 공부했다. 1923년 그녀는 뮌헨에서 처음 개인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후 해외로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레니는 우연히 영화 ‘운명의 산’이란 작품을 보고 난 뒤, 깊은 영감을 받아 감독 아르놀트 팡크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만남을 가졌다. 당시 팡크 감독은 이전의 영화와 달리 직접 카메라를 들고 외부로 나가 자연 환경을 실감나게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레니에게 팡크의 작품은 훗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직접 영화사를 설립해 작품을 제작한 레니

레니는 특히 산과 극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관심이 많아 팡크 감독의 영화 ‘성스러운 산’, ‘위대한 도약’, ‘피츠 팔뤼의 하얀 지옥’, ‘몽블랑의 폭풍’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녀는 연기를 하며 틈틈이 영화 제작에 관해 배웠다. 그녀는 감독을 대신해 직접 일부 장면의 촬영을 감독하기도 했다.

여러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 이름을 알린 레니는 영화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32년 그녀가 직접 감독하고 편집, 출연까지 한 영화 ‘푸른 불빛’이 세상에 나왔고, 이 작품은 개봉하자마자 흥행을 거둬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레니는 이때부터 감독으로서 두각을 드러내며 다양한 예술적 기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 반열에 오르다

한편 당시 독일의 총리가 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매료된 레니는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만남에 성공했다. 이후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괴벨스, 헤스, 슈페어 등과 함께 만나며 히틀러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이후 히틀러는 레니에게 여러 차례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기록영화 제작을 요청했고, 이를 거부를 하던 레니는 결국 받아들여 1933년 ‘신념의 승리’라는 영화를 선보였다.

이후 히틀러는 계속 영화 제작을 의뢰했고 레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장비를 활용해 대회장의 모습을 담았는데, 수개월간 편집 작업을 거쳐 ‘의지의 승리’란 다큐멘터리를 내놓았고, 나치당 전당대회의 모습을 권위 있게 담아내 당시 유럽 각국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으로 레니는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 반열에 올랐지만 훗날 나치에 동조했다는 오명을 얻었다.

노년에도 촬영에 대한 열정을 이어간 레니

영화감독으로서 인정을 받은 레니는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그중 1938년 히틀러의 생일에 개봉했던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는 무려 1년 반이 넘는 편집 과정을 거쳤다. 이 작품은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스포츠 다큐멘터리로, 새로운 개념의 다큐멘터리를 선보여 초기 올림픽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나치의 조력자로 지목된 레니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니는 1954년 영화 제작을 이어가 칸 영화제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60대의 나이에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이어간 그녀는 아프리카로 떠나 현지인들의 사진을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의 잡지에 게재했고, 직접 스쿠버다이빙을 배워 수중 세계를 촬영하기도 했다. 200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아직까지도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란 업적과 나치의 핀업 걸이라는 오명 사이에서 분분한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Archives Riefensta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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