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최지민]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출생-사망 / 1858년 7월 14일 ~ 1928년 6월 14일
▶ 국적 / 영국
▶ 활동분야 / 시민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급진주의자 가정에서 자라 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여성사회정치연맹 WSPU를 설립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위해 활발한 운동을 전개했다.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 마침내 1928년 영국에서 남녀동일하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 급진주의자 가정에서 자라 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맨체스터의 급진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에멀린은 14살 때 영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리디아 베커의 강연을 듣고 법적으로 남성의 소유물로 종속된 19세기 여성들의 삶에 회의를 품었다. 이후 그녀는 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빅토리아 시대 사회 문제에 의문을 품다

에멀린은 1879년 변호사 출신의 여성 참정권론자인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했다. 리차드 팽크허스트는 적극적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는 지지자였다. 결혼 후 5명의 아이를 낳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녀들에게도 여성 참정권에 대한 교육을 했고 남편의 급진적 정치활동에도 함께 참여했다. 에멀린은 남편과 함께 독립노동당에 들어가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사회 문제와 여성의 불평등, 참정권 획득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 여성사회정치연맹 WSPU를 설립하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권력은 보통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재산가 남성들에게 주어졌다. 당시 여성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일부 지식인이 여성의 참정권을 꾸준히 의회에 상정했지만 매번 부결되었다. 이에 참지 못한 에멀린은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여성사회정치연맹) 설립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WSPU의 지도자를 맡았고 여성도 시민으로써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WSPU는 여성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조직의 목표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여오던 WSPU의 200여명 여성들은 1912년 3월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입법부에 항의하기 위해 폭력운동을 전개했다.

-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의견을 거부한 영국 정부

에멀린 팽크허스트에게 영향을 받아 그녀의 딸들도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팽크허스트가의 모녀는 여성참정권을 위해 투쟁하다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1913년 한해에는 무려 12차례의 단식 투쟁도 이어갔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되면 결혼제도와 가족제도가 위태로워지고 남성들의 권위를 위협할 것이라며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의견을 거부했다.

- 인민대표법을 통해 마침내 여성도 참정권을 갖게 되다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시위는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갔으며 영국의 경찰서는 여성 시위자들로 가득했다. 폭력과 탄압이 지속되다가 1914년 마침내 여성 참정권에 대한 합의안이 마련되면서 갈등이 좁혀지기 시작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영국 정부는 인민대표법을 의결해 마침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인민대표법은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불완전 선거권이었기 때문에 1928년에 남녀동일하게 21세부터 선거권을 갖도록 개정되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그녀의 민주평등운동은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영국에서 이뤄진 에멀린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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