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지민]

▶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 출생-사망 / 1810. 06. 08. ~ 1856. 07. 29.
▶ 국적 / 독일
▶ 활동 분야 / 작곡가, 평론가

멘델스존과 함께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만’. 평론과 저술 활동을 통해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베를리오즈 등의 많은 음악가들을 알리고 도움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며 피아노와 가곡 분야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피아니스트가 되길 원했던 어린 시절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출판업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와 책들을 다양하게 접하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으며 그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는 어머니의 희망으로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슈만은 음악을 버릴 수 없었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선생님을 찾아다니다 당대 최고의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작곡에 전념하게 된 계기

연습에 몰입한 슈만은 손가락의 힘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 고안한 연습 기계를 직접 실험해 보다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만다. 이 일로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음악신보’의 창간

슈만은 1834년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논문과 평론, 비평을 하며 음악에 대해 적극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격동기로 혁명과 반동이 일어나며 복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명이었던 쇼팽과 브람스도 <음악신보>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었다.

소송 끝에 스승의 딸과 결혼

슈만은 비크 교수의 딸이자 당시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스승인 비크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강력히 반대했고 당시 클라라의 나이가 17살이었기에 미성년 유괴로 고소했다. 하지만 슈만은 스승이 결혼을 못 하게 한다며 맞고소했고 법정 싸움 끝에 소송에서 이긴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슈만의 활발한 작곡 활동

슈만은 작곡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고 행복한 결혼은 슈만의 창작열에 불을 지폈다. 특히 ‘가곡의 해’로 불리는 1840년에는 평생 작곡한 가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클라라에 대한 사랑 노래가 넘쳤다. 클라라에게 헌정한 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비롯해 〈리더크라이스〉,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을 작곡했다. 1841년은 '교향곡의 해'로 교향곡 제1번 전곡과 제4번의 초고를 썼으며, 1842년은 '실내악의 해'로 세 개의 현악 4중주와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를 작곡했다.

비극적인 말년

이후 슈만은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제2번〉을 완성했지만 1854년부터 본격적으로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신 착란이 심해지며 환상이 보이기도 해 슈만은 스스로 라인 강에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슈만은 두려움에 휩싸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그렇게 2년을 보내다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접했기에 슈만은 독일 낭만파의 지도적 음악가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창작과 연주뿐만 아니라 문필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근대적인 정신을 가진 음악가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슈만’. 그야말로 시대를 대변한 진정한 낭만주의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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