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최지민]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 출생-사망 / 1861년 5월 7일 - 1941년 8월 7일
▶ 국적 / 인도
▶ 활동분야 / 작가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시집을 발표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은 시련과 고난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했다. 103편의 연작시를 담은 타고르의 대표작 ‘기탄질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서 극찬을 받았다.

-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자란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무역업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부친은 흰두교를 개혁해 위대한 성자라는 뜻의 ‘마하르시’란 호칭을 얻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타고르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인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 어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낸 타고르
타고르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했고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를 지으며 문학적 재능을 뽐냈는데, 실제로 그가 14세 때 지은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타고르에게 문학은 취미활동에 불과했고 1878년 집안의 독려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는 1880년 말에 다시 귀국했다. 이후 그는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분야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 작가로 인정받은 후 교육과 농업 공동체 개혁 시도
타고르는 1890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바로 시집 ‘마나시’를 간행했다. 이 시집은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고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교육과 농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01년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인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러한 개혁은 간디보다 20년, 인도 정부보다 50년이나 먼저 이뤄진 것이었다.

- 연이어 인생의 고난을 겪게 된 타고르
야심찬 목표를 갖고 개혁을 시도했지만 타고르에게 연이어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아내와 부친, 아들, 딸이 수년 사이에 연이어 죽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공동체 사업도 어려운 재정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타고르는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겼다.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타고르는 시로 승화했고 1910년 103편의 연작시를 담은 또 한 권의 시집 ‘기탄질리’를 발표한다.

- 인간과 신의 관계를 표현한 시집 ‘기탄질리’, 노벨 문학상 수상
타고르는 ‘기탄질리’ 시집 중에서 57여 편을 직접 영어로 번역해 1912년 영국에서 출판했다. ‘기탄질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의미로, 인간과 신의 관계를 시로 표현했다. 해외에서도 극찬을 받은 ‘기탄질리’ 작품으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음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이 된 타고르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민지에 놓여있었던 당시 인도의 상황에서 그는 영국의 폭압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13일 시위에 나섰던 인도인 수백 명이 영국군의 총격에 사망한 암리차드 학살 사건에 분노해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반납했다.  

이후 타고르는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시집은 세계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깊은 영감을 남겼다. 타고르가 79세가 되던 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학위증명서였다. 이듬해 타고르는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진한 여운을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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