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40여년 동안 퀀텀 펀드를 운용해 20세기 최고의 펀드 매니저로 통하는 ‘조지 소로스’. 21세기 초까지 40여개가 넘는 나라에서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열린 사회재단이 운영되었고 21세기에는 자선 활동과 정치적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금융업계에 발을 내딛게 된 소로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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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44년 나치가 헝가리를 침략하자 1947년 그의 가족들은 런던으로 이주했다. 소로스는 런던경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그는 철학자가 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런던의 싱거앤드프리들랜더 상업은행에 입사하며 금융업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다 1956년 뉴욕시티로 이주해 유럽 증권 분석가로 일하며 월가에 자리 잡아갔다.

퀀텀 펀드의 경이적인 수익률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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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소로스는 퀀텀 펀드(Quantum Fund)를 설립해 운용하면서 펀드매니저로서 투자 대상을 계속해서 넓혀나갔다. 투자에 대한 과감한 결정으로 펀드는 빠르게 성장해나갔고 퀀텀 펀드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S&P 500 지수가 47% 상승하는데 그치는 동안 4,200%의 경이적인 수익률을 거두기도 했다.

영국 중앙은행을 굴복시킨 사나이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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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는 1992년 신화적 금융가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을 예측하고 퀀텀 그룹의 회사를 동원해 수십억 파운드를 매도했다. 영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는 등 방어에 나섰지만 부질없었고 결국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소로스는 약 10억 달러의 수익을 얻었으며 그의 전략으로 영국 중앙은행을 굴복시킨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각국에서 통화위기가 발발할 때마다 소로스는 배후로 지목된다.

자선 사업가로도 활동하는 소로스

[사진/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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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경의 소로스는 열린사회기금을 창설한다. 헝가리에서 장학금을 수여하고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며 학교와 사업체들을 현대화하는 것을 도왔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되면서 소로스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러시아, 유고슬라비아에 재단을 설립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본인은 단기적인 환투기로 돈을 벌면서 서방세계의 경제적 단기주의를 비난하는 일관되지 못한 소로스의 태도를 비난했다. 하지만 소로스가 거액을 지출해 동유럽 및 그 외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 것만큼은 사실이다.

더 큰 수익을 얻어 실패를 만회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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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가 투자할 때마다 성공을 거뒀던 것은 아니었다. 대규모의 손실을 볼 때도 많았지만 소로스는 외환, 주식, 채권 시장을 넘나들며 공격적이고 다양한 투자를 함으로써 더 큰 수익을 얻어 실패를 만회했다. 

한 예로 1994년 미국과 일본의 무역 협상이 타결되면 엔화가 하락할 것으로 보고 엔화를 집중적으로 매도하는 투기에 나섰다. 하지만 엔화는 1995년 초 달러당 79엔이라는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았고 그는 6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그런데도 소로스의 펀드는 실적 회복 기업에 대한 주식투자를 한 덕에 1995년에 39%라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던 ‘조지 소로스’. 분명 그가 큰돈을 만질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며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그의 날카로운 분석 덕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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