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지난 9일 별세한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한 일대기를 보냈다.

물론 법적인 차원에서 여러 책임이 있는 부분은 사실이지만 그가 만들어나간 세계경영과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결실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서일까 지난 12일 열린 故 김우중 전 회장의 영결식은 아침부터 조문객 2천 여명이 몰리는 등 애도하는 물결이 끊이지 않고 있다. 故 김 전 회장의 생애 가치관인 ‘창조’ ‘도전’ ‘희생’ 정신을 재조명 해보자.

故 김우중 전 회장의 빈소 (연합뉴스 제공)

청년 김우중의 포부, ‘대우’를 탄생 시키다

삼성과 현대를 만들고 키워낸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故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 생활부터 한 1.5세대 창업가로 불린다. 고인의 ‘대우그룹’ 축성은 그가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그간의 경험을 살려,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최초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여러 설에 따르면 대우(大宇)라는 사명은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계경역의 가치를 실현시킨 청년 김우중

당시 청년 김우중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서서히 ‘세계경영’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둔 것. 그렇게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막대한 자금을 축적한 청년 김우중은 훗날 대우그룹을 설립하게 된다. 트리코트 원단으로 성공을 한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으며,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기에 '타이거 킴'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故 김우중 전 회장 (연합뉴스 제공)

발 빠른 대우그룹 사업 확장...자산 규모 4위로 우뚝

청년 김우중의 노력으로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그렇게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를 호주 시드니에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또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을 새롭게 출범했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해서 당시만 해도 삼성, 금성과 함께 대우 가전의 명성은 자자했고, 김우중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 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출범 30년 만에,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그렇게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 한 김우중 전 회장.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 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천명을 기록했다. 당시 김 전회장의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이 넘을 만큼 세계 경영에 집중했다. 그렇게 대우그룹은 대우실업에서 출발한지 30여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故 김우중 전 회장의 몰락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 신화에 몰락을 불러왔다. 특히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는데,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이후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설상가상으로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故김우중 회장 추모하는 '김우중 사관학교' 졸업생 (연합뉴스 제공)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고인의 ‘세계경영’의 가치

그룹 해체 후 흩어졌던 대우 임직원들이 2009년 김 전 회장을 중심으로 모여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설립해 사회적 활동을 이어나갔다. 특히 김 전 회장은 생전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통해 청년 해외 취업 프로그램인 'GYBM'을 운영했는데, 김우중 사관학교로도 불리는 GYBM 프로그램은 2011년 베트남에서 시작해 지난해 말까지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수료생 1천여명을 배출했다. 현재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4천700여명, 해외지회 37개소 규모다.

김 전 회장이 남긴 또 다른 조직 및 기관으로는 대우재단, 대우학원, 아트선재센터 등이 있다. 모두 김 전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들었는데, 특히 대우재단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기초학문분야 학술 지원을 주 사업으로 한다. 또 대우학원 산하에는 아주대학교, 아주자동차대학교가 있다. 김 전 회장은 1977년 대우실업 사장이었을 당시 "교육사업으로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아주대를 인수한 것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 그래서일까 김 전 회장은 아주대병원에서 수개월 간 투병하다 별세했고, 장례식도 아주대에서 치러졌다.

故 김우중 전 회장 (연합뉴스 제공)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해 30년 만에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키운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비록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큰 부도를 맞았지만, 대한민국 경제 역사에 ‘대우’와 고인의 발자취는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또한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고인의 가치와 삶의 철학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별세한 故 김우중 전 회장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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