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지민]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 출생-사망 / 1732. 03. 31. ~ 1809. 05. 31.
▶ 국적 / 오스트리아
▶ 활동 분야 / 작곡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 <사계> 등 오라토리오 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음악적 재능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인 아버지를 둔 하이든은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부모는, 로라우의 북동부에 있는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에서 재직하던 음악 교사에게 하이든을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그곳에서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 하인부르크 성당의 성가대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참가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하이든의 작곡
금전적으로 힘든 삶은 계속되었지만 하이든은 작품이나 중요한 음악 이론서들을 열심히 독학으로 연구했다. 그러다 당시 꽤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에게 잠깐 수업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이든이 받은 첫 본격적인 작곡 수업이었다. 이후에도 유명한 대위법 교재인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과 같은 초기 고전주의 작품들의 악보를 사보해 연구하는 등 이론 기반을 강화하면서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초기 교향악과 관악합주를 작곡하다
인내와 노력으로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마침내 그는 귀족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에 소개되었으며, 하이든을 마음에 들어 한 퓌른베르크는 모르친 백작 집안에 악장으로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음악적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 귀족의 저택에서 악기 연주자로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쓴 초기 현악 4중주들을 시작으로 그는 일생 동안 80여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이 음악형식을 발전시켰다.

나폴레옹의 빈 공략 포성을 들으며 눈을 감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도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시기에는 주로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음악에 전념했고, 종교음악 외에는 트럼펫 협주곡과 현악 4중주를 비롯한 후반기의 걸작 기악곡들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칠십을 넘긴 1802년부터는 건강이 영 좋지 않게 되었고, 작곡도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하던 때에 하이든은 세상을 떠났고 빈의 명사들과 프랑스의 고급 장교들도 천재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죽은 이후에도 예기치 못한 시련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고 가문의 묘에 안장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 졌고 그의 머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알고 보니 오스트리아 귀족 중 한 명이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 머리를 꺼냈으며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겨버린다. 후손들은 하이든의 머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100여 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고 수소문 끝에 찾아내 유해반환소송을 했고, 결국 어렵게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무덤에서 파헤쳐 져 머리가 분리된 지 무려 145년 만의 일이었다.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꾸준히 작곡하며 그 틀을 잡아나가 교향곡의 형식이 되는 기준을 마련한 ‘하이든’.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기악 양식의 모든 분야에 그의 손길이 닿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사에 남긴 그의 업적은 영원히 우리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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