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층의 딸’ 에바 페론, 아르헨티나 퍼스트레이디 된 비결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빈민층의 딸’ 에바 페론, 아르헨티나 퍼스트레이디 된 비결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 보도본부 | 최지민 pro
  • 승인 2019.10.1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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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이시연 / 디자인 최지민]

▶ 에바 페론 (Eva Peron)
▶ 출생-사망 / 1919~1952
▶ 국적 / 아르헨티나
▶ 활동분야 / 뮤지컬배우, 퍼스트레이디

특유의 감수성과 선동적 기질로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에바 페론. 빈민층의 딸로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퍼스트레이디의 영광을 거머쥔 인물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생아

에바 페론은 어머니 후아나 이바르구엔과 인근의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안 두아르테는 에바 페론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많은 아이들을 낳았음에도 법적인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로 에바 페론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다.

어느 날 에바 페론은 잡지 속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됐고, 자신도 화려한 배우가 되기를 꿈꾸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었던 시골 소녀 에바 페론은 녹록지 않은 도시생활을 보냈고, 삼류 연극배우부터 시작해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권력자 ‘후안 페론’과의 운명적 만남

오랜 고생 끝에 에바 페론은 1940년경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지 10년 만에 당대 최고 권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리더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에바 페론은 그를 처음 본 순간 운명의 상대임을 알아봤고, 후안 페론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됐다.

후안 페론에게 찾아온 위기 ‘페론주의’

당시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가치를 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페론주의는 후안 페론에게서 나온 정치 운동으로 각종 산업 국유화, 노동자 복지 정책 확대, 노동자 실질임금 25% 인상 등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무리한 사회 경제 정책으로 1949년부터 무역 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인 후안 페론은 독재 정치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반 페론주의자들이 집권한 후 후안 페론을 구금해 버리기에 이르렀고, 후안 페론은 정치 생활 시련을 맞게 됐다.

에바 페론의 감성과 선동적 기질

후안 페론이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게 되자 에바 페론은 그를 돕기로 했다.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쌓아온 재능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힘을 가진 에바 페론은 자신을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밝히며 자신의 인생 역경 스토리를 밝혔다.

에바 페론의 감성적인 연설과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는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술렁이는 민심을 체크한 에바 페론은 구금된 후안 페론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후안 페론은 노동자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구금 10일 만에 전격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에바 페론 사망 후에도 이어지는 애도

에바 페론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후안 페론은 그녀와 결혼을 결심했고, 두 사람은 1945년 정식적인 부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9년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로 영광을 누리다 1952년 34세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에바 페론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다. 그녀가 사망한지 한 달이 지나도록 장례식은 국민들의 행렬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과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페론주의’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많은 대중들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의 농가에는 에바 페론의 청동 조각상이나 초상화가 걸린 집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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