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지민]

▶ 마더 존스(Mary Harris Mother Jones)
▶ 출생-사망 / 1837년 8월 1일 ~ 1930년 11월 30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노동운동가

미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마더 존스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어머니라 불리며 저항의 대명사로 남았다.

남편과 자녀를 잃게 된 메어리 존스

마더 존스의 본명은 메어리 해리스로 1837년 아일랜드의 콜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에 아일랜드 주민들은 대부분 가난과 수탈에 찌든 상태였다. 특히 1845년에는 농민들의 주식인 감자를 썩게 만드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수년 사이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떠났다.

메어리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중퇴 후 186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잠시 교사로 재직했다. 이듬해 조지 존스라는 기술자를 만나 결혼해 메어리 존스라 불리게 되었다. 평범한 삶을 살던 메어리 존스는 1867년 멤피스에 닥친 황열병으로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게 되면서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탄광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파업에 동참한 메어리 존스

30세에 남편을 잃게 된 메어리 존스. 그는 시카고로 건너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악재는 끊이지 않게 된다. 1871년 대 화재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된 것. 연이은 시련을 겪은 메어리 존스는 1877년 시카고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때부터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전미광산노조의 일원이 되어 광산, 철도, 철강 등 주요 산업 분야의 파업에 동참했다.

파업에 앞장서면서 그녀는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메어리 존스라는 이름 대신에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진 ‘마더 존스’로 불렸다. 60세의 나이에 파업 운동을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주위의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메어리 존스는 자신을 소란꾼이라 자칭하며 189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주로 탄광 노동자들을 대변하기도 했다.

아동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맞선 마더 존스

마더 존스는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 주의 광산 파업을 지원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구속과 재판 과정을 거치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03년 7월 7일, 아동 노동에 항의하기 위해 100여 명의 아동 노동자를 이끌고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 100마일을 행진했다.

당시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은 실패했지만 미국 사회 내에서 아동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아동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하며 그들을 마치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빈곤 속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며 사회적 불의에 저항했고 폭압에 맞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저항의 대명사로 남은 여성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

마더 존스는 1925년에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산 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라.” 라는 좌우명을 남겼다. 그녀는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진보 인사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소통했다. 마더 존스는 노동자들이 산업 전체를 장악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30년 마더 존스가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대중들에게 잊혀 지게 된다. 하지만 다시 1960년대 이후에 미국 사회에서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노동운동가였던 마더 존스에 대해 재조명되었다. 1992년 미국 노동부는 마더 존스를 노동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오늘날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저항의 대명사로 유명한 여성 노동운동가로 남게 되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