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최지민]

▶ 요한 세바스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 출생-사망 / 1685.3.21. ~ 1750.7.28.
▶ 국적 / 독일
▶ 활동분야 / 예술(음악)
▶ 주요작품 /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음악의 헌정》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프랑스모음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궁정악단에서 연주와 지휘를 하고, 교회음악가로 활동하면서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곡들을 많이 남겼다. 그런 그는 현재까지도 ‘음악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숙명과도 같았던 음악가로서의 길
바흐는 탄생과 동시에 음악가로서의 어떤 숙명을 지녔다. 그의 집안은 약 200년에 걸쳐 무려 50명 이상의 걸출한 음악가를 배출한 그야말로 ‘음악’ 가문이었다. 특히 바흐의 아버지는 거리의 악사였고 이런 배경에서 태어난 바흐는 내면의 음악적 기질과 음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 과정 속에서 아버지에게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당숙에게서는 오르간 연주를 접하며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집에서 살며 독일 오르간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1700년부터는 독립하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종교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활동은 향후 바흐의 음악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회 연주 활동과 함께 만들어진 명작
바이올린과 오르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또 계기가 되어 3개월 후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함께 활동하게 되었는데, 평소 오르간 연주에 흥미가 컸던 바흐는 주자로 활동하며 연주법과 작곡법을 더욱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바흐는 자신만의 예술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며 그의 대표작인 라단조의 ‘토카타와 푸가’,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 등을 탄생 시켰다. 이후 활동 영역을 더 넓혀 뮐하우젠에 위치한 성브라지우스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동, 교회 칸타타(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 작업에도 착수 했으며 수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결혼 이후 한층 더 성숙해진 음악성
1707년 바흐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음악인 가정을 꾸린 바흐는 13년에 걸쳐 7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참고로 그 자녀들 또한 음악적 소질이 남달라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 등 훌륭한 음악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바흐 역시 상당한 음악적 완숙미를 갖춰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했는데, 특히 그의 주요 작품인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코랄전주곡’ 등 오르간 음악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교회 칸타타 작품 활동 역시 활발해졌고, 이탈리아 악파까지 공부하며 기발한 편곡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 하는 등 그야말로 바흐라는 이름으로 음악적 신기원을 이뤄나갔다.

여생을 교회 음악과 창작의 힘으로 살아간 바흐
음악적 명성을 두고 본다면 바흐에게는 찬란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음악적 명성이 자자했던 그의 집안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빚어졌고, 명성과는 다르게 대외적인 바흐의 지위는 그다지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 이에 실망감이 깊어진 바흐는 1717년 말 바이마르궁정악단을 떠나 괴텐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결심을 했다. 그곳에서 좀 더 편안해진 바흐는 더욱 열심히 음악 창작 활동을 펼쳐나가며 다양한 명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악곡에서부터 바이올린협주곡, 소나타와 파르티타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의 영감은 그야말로 빛을 발휘했다.

이후 바흐는 1723년부터 한 교회의 칸토르(성가 합창단의 지휘자 겸 선창자)에 취임하여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27년간을 음악에 매진했다. 그 결과 이 기간 동안에만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를 비롯해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시대를 풍미한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은 시력저하와 뇌졸중을 야기했고, 결국 1750년 7월 28일 신의 바흐의 숨을 거두어 갔다.

“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바흐에 대한 베토벤의 평가 중 인상적인 구문이다. 그만큼 다른 저명한 음악가에게도 남다른 평가를 받아 온 바흐의 천부적 음악적 재능은 현 시대에도 NO.1으로 기억되게 할 만큼 강인했다. 바흐가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에 모두가 수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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