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이연선]

▶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 출생-사망 / 1736년 5월 29일 ~ 1799년 6월 6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독립운동가

변호사 출신의 패트릭 헨리는 버지니아 주지사로 활동하며 주의 권리와 미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헌신했다.

-거듭된 실패 후 변호사로 성공한 패트릭 헨리
패트릭 헨리는 버지니아의 해노버 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패트릭 헨리는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 했지만 매우 영민했고 어릴 때부터 언변에 매우 뛰어났다. 1754년 새러 셸턴과 혼인한 패트릭 헨리는 장인에게 선물 받은 농장의 주인이 되어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1757년 화재로 인해 많은 재산을 잃었고 거듭된 사업의 실패로 좌절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패트릭 헨리는 자신의 언변 능력을 살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변호사가 된 헨리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1763년 ‘사제의 소송’ 사건은 그를 유능한 변호사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급진적인 지도자로 영국 정부에 맞선 패트릭 헨리
그 후 패트릭 헨리는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 하원의원으로 진출했다. 그는 영국의 왕권에 대항하는 연설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연설은 영국이 세입을 증대하기 위해 식민지에 인지세법을 부과하는 내용이었다. 인지세법은 식민지의 상업 및 법률 서류, 신문, 팸플릿, 카드, 달력, 주사위 등에 직접세를 부과하는 법인데 식민지 주민들은 엄청난 세금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헨리는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서 영국 정부와 식민 정책에 강력하게 맞섰고 급진적인 지도자로 떠올랐다. 1774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 1차 대륙회의에 참여한 패트릭 헨리는 미국의 민병대 조직을 주장했다. 덕분에 각 지역의 식민지 협의회는 민병대를 조직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력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다.

-독립전쟁을 지지하며 미국의 독립에 앞장선 패트릭 헨리
당시 영국 의회에서는 미국에서 민병대가 조직되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하고 군대를 보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투가 일어나면서 아메리카 독립전쟁이 시작되는데, 1776년 헨리가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면서 3년 동안 재임하며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또 그 해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공식 발표해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 선언서는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계기가 되었다.

-주와 개인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패트릭 헨리
패트릭 헨리는 연방정부보다는 버지니아 주와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그는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위원회 참석에 거부하며 연방정부 설립에 반대했다. 연방헌법이 주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는 1788년 버지니아 협의회에서 연방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세력을 이끌며 강하게 대항했다. 헨리는 연방헌법에서 주의 권리장전 조항이 통과된 후에야 연방정부와 손을 잡았다.

미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는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 대통령이 관직을 몇 차례 제안했지만 번번히 거절했다. 그는 1799년 주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얼마 후 6월 6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패트릭 헨리는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대변했고 미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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