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중국 최대의 기업 창장그룹의 창시자인 사람이 있다. 2011년 <포브스>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11위, 2007년 <포춘> 선정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CEO 1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손꼽히며 중국인 중 세계 최대의 부자 중 한 사람. 본토 발음으로 ‘리카싱’이라고 부르는 ‘리자청’에 대해 알아보자.

[사진/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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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구점 판매원에서 플라스틱 공장을 세우기까지
리자청은 아버지가 어린 시절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완구점 판매원으로 취직한다. 하루에 평균 16시간 근무를 했으며 성실함과 영업 능력을 인정받아 완구점의 총지배인으로 승진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독학하며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린다. 홍콩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능숙한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자청은 직장을 다니면서 늘 창업을 생각했기 때문에 완구점에서 재임용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직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모은 7천 홍콩달러에 약간의 대출을 받아 직원 2명 규모의 창장플라스틱 공장을 세운다. 

반성과 잘못을 인정함으로 위기를 극복하다
그는 창장실업에서 장난감, 비누 케이스, 가정용품 등을 생산하며 이전 회사와 같은 분야의 회사를 운영했지만 전 회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바이어가 제품의 품질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상품 반환 요구를 해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지만 이때 낮은 품질과 신용 하락에 대한 반성과 경영상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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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고 돈맥을 찾아내다
리자청은 어느 날 이탈리아의 한 화학회사가 플라스틱 조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조화가 대히트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인기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까지 예상했다. 이에 그는 플라스틱 조화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곧장 이탈리아로 향한다. 임시직 노동자 신분으로 이탈리아 공장에 취직하여 어깨너머로 관련 지식을 익히고 핵심 기술자들과 친분을 쌓는 방법으로 기술을 배웠다.

얼마 후 리자청은 홍콩으로 돌아와 곧바로 조화를 개발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조화를 내놓으며 창장실업은 아시아에서 조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화학업체가 되었다. 하지만 창장실업이 실제로 크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바로 부동산 투자이다. 

지속적인 부동산 투자와 개발사업
1964년 홍콩 내 불어닥친 은행의 자금 회수 붐과 1967년 세계적인 오일 쇼크,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홍콩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리자청은 정치적 혼란이 일시적일 것으로 보고 저가에 부동산을 매입했다. 창장실업은 지속적으로 부동산 투자와 개발사업을 벌여 1972년 홍콩 증시에 1번 기업으로 상장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영국계 항만물류기업인 허치슨 왐포아를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갑부로 발돋움한다.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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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억만장자에 이름을 올리다
허치슨 왐포아를 인수할 당시 영국계 자본의 대기업을 식민지의 화교 기업인이 처음으로 인수해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도 리자청은 영국계 기업을 여럿 인수했으며 최근에는 영국의 전기, 수도, 가스 등 기간산업에까지 인수 기업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리자청은 2011년 <포브스> 선정 세계 억만장자 중 11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번듯한 학력이나 배경 없이 무일푼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갑부로 성장한 그에게 많은 사람이 박수를 보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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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청은 기부하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서고 있으며 교육, 의료 학술 지원 등을 위해 리자청기금회를 설립하고 중국과 홍콩의 교육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세계적인 부호이면서도 근검절약하는 생활 태도로도 유명한 리자청. 항상 직원들과 식사하는 것을 즐기고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세계적인 많은 갑부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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