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2025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순신’은 누구인가

2025-04-28     박진아 기자

시선뉴스=박진아, 정혜인 기자 / 디자인=김선희 proㅣ겨울이 끝을 알리자, 봄맞이 채비를 마친 전국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꽃 축제들이 열렸다. 서울시도 봄철에 찾아오는 황사와 미세먼지 등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두껍게 덮은 묵은 때를 씻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4월에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 있기도 해 관련 행사들이 여럿 열리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은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에 대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28일로 제정된 기념일이다. 과거에는 이를 충무공 탄신일로 불렀으나, 충무공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시호이기에 2013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명명했다.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에 여러 명이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시대의 장군으로, 임진왜란에서 전투마다 승기를 잡으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조선시대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그는 1545년(명종 즉위)에 태어나 1598년(선조31)에 사망했다. 

생전 이순신은 정의감과 용맹함을 두루 갖춘 데다 충효와 문학, 시를 짓는데도 재능이 뛰어났으며, 인자한 성품까지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는 유년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도 컸다고 한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에 큰 뜻이 없어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 가세는 기운 상태였다. 그래도 변수림(卞守琳)의 딸인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아들을 아끼면서도 가정교육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이 『징비록(懲毖錄)』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유성룡은 또 이순신이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도 묘사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이며 무예를 닦아 나갔고,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이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있을 때 억울하게 패전의 책임을 지게 돼 백의종군하게 된 채로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1589년(선조 22), 그는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에 의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된 것은 47세가 되던 1591년이었다.

널리 알려진 임진왜란에서 활약은 그다음의 일이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던 시기 이순신은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보다 열세였던 조선 수군의 전력으로 23전 23승 불패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명량해전서 대장선 1척으로 일본 함선 133척과 붙어 싸우는 등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에 교차 검증에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더군다나 지원도 열악했던 가운데 자신만의 노력으로 그야말로 ‘기적’을 이루었다. 공명정대함의 표본으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노비까지 공이 있으면 세세히 적어 포상을 받게 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지나면서 갈리는 경우가 있으나 이순신은 지금까지도 전국민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2025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아 고난의 역사와 이순신의 충의를 다시금 새겨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