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도수 낮춰 생산 원가를 절감하는 ‘드링크플레이션’ [지식용어]
시선뉴스=양원민 기자 / 디자인=김선희 proㅣ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소주의 도수는 시대마다 조금씩 변해왔다. 과거엔 20도가 넘거나 육박하는 소주가 일반적이었으나 최근 주류를 이루는 소주의 도수는 16도가량까지 내려와 있다.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도수를 낮췄다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제조업체에서 이윤을 위해 고지 없이 몰래 도수를 낮췄다면 어떨까.
‘드링크플레이션(drinkflation)’이란 주류회사들이 주세를 줄이기 위해 소비자들 모르게 알코올 함량을 줄인 상황을 반영한 단어다. 이는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품의 크기나 중량을 줄여 사실상 값을 올리는 효과를 만드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에 빗댄 것이다.
‘드링크플레이션’은 2023년 초 영국의 맥주 회사들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춘 사실이 발각되며 등장했다. 당시 소비자에게 고지 없이 알코올 도수를 0.2~0.3도씩 낮춘 회사들은 ▲포스터(Foster’s) ▲올드 스페클드 헨(Old Speckled Hen) ▲비숍스 핑거(Bishops Finger) ▲스핏파이어(Spitfire) 등이었다.
영국 조세 당국은 알코올 도수가 높을수록 세금을 많이 물리는 방식으로 차등 부과하는데, 지난해 8월부터 차등 부과가 강화된 주세 규정이 적용되자, 양조 업체들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춰 세금 부담을 피한 것이었다.
이에 영국 현지에서는 양조업계가 세금을 낮추기 위해 ‘꼼수’를 썼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예컨대 비숍스 핑거는 원래 도수(5.4%)를 유지하면 맥주 500ml 한병당 52펜스(약 740원)의 세금을 내야하는데, 도수를 5.2%로 낮추면 50펜스(약715원)만 내면 되기 때문에 병당 약 25원을 절감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양조장이 알코올 도수를 0.3도 낮추면 주류업계는 2억5천만파운드, 약 4천500억원을 절세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문제는 세금은 적게 내 결과적으로 원가 부담은 낮췄음에도 맥주 가격은 그대로 유지해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없다는 데 있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병과 캔의 모양이나 크기에는 변화가 없고 같은 양의 액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드링크플레이션이 슈링크플레이션보다 더 교활하다”며 “소비자들이 같은 돈을 내고 자기도 모르게 몇 달씩이나 약한 도수의 맥주를 마셔온 것”이라고 했다.
비판에 직면한 주류회사들은 각기 다른 해명을 내놓았다. 올드 스페클드 헨을 만드는 그린 킹(Greene King)은 인플레이션을 거론하며 “원자재 포장비,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는 등 생산 비용이 증가한 데 따른 조치”라며 사실상 세금을 포함 원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 도수를 낮췄다는 점을 인정했다. 반면 비숍스 핑거를 만드는 셰퍼드 님(Shepherd Neame)은 “소비자들이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점점 알코올 함량이 낮은 음료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상황은 어떨까. 우리나라는 지난해 4월부터 맥주에는 리터당 885.7원, 막걸리는 리터당 44.4원의 세율을 적용 중이다. 이는 기존보다 3.57%(각각 30.5원, 1.5원) 오른 금액이며, 맥주는 주세 인상 폭이 역대 최대였다. 당시 주류업계에서는 각종 원부자재값에 주세마저 올라 가격 인상이 절실했지만, 정부가 술값 인상 자제를 요청해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결국 주류업체들은 술값을 인상했다.
이렇듯 주세 인상은 결과적으로 가격 인상이나, 드링크플레이션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부담은 결국 돌고 돌아 소비자가 지게 되는 것이다. 종량세와 종가세 등 나라·주종마다 책정되는 세금의 비율과 방식이 다르지만, 전 세계 많은 사람이 퇴근 후 술 한잔 기울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만큼, 각 정부는 적절한 술값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