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피플] ‘민중적 서정시인’ 신경림 별세...애환의 언어를 쓴 문인
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지난 22일, 신경림 시인이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그는 암으로 투병하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에 한국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등 문인 단체들은 고인의 장례를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르기로 뜻을 모았다.
1936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난 신경림 시인은 충주고등학교에 다닌 뒤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가 문단에 나온 건 1956년 ‘문학예술’ 잡지에 시 ‘갈대’ 등이 추천되면서부터다. 이때 시 ‘석상’, ‘낮달’, ‘묘비’도 발표되었다.
그런데 신경림 시인은 이후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건강 문제로 인해 고향에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또 서울로 올라와 잡지사 및 출판사 등에 취직해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건 1965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197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는 신경림 시인의 ‘농무’, ‘전야’, ‘서울로 가는 길’ 등 5편의 시가 발표되었다.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담은 그의 시집 ‘농무’는 1973년 세상으로 나왔다. 이후 그는 꾸준히 다양한 시와 시집, 시론과 평론집을 펴냈다.
특히 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에 등장하는 구절은 여전히 많은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은 ‘민중적 서정시인’이라고 불렸다. 주로 농촌을 바탕으로 슬픔과 한, 굴곡진 삶의 풍경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평론가 백낙청, 문학평론가 최원식을 비롯한 다수의 평론가는 그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부터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에는 제2회 이산문학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외에도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신경림 시인은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 회장과 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공동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시인은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에도 부임했다. 2001년에는 문화예술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삶의 쓸쓸하고, 고적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신경림 시인의 시는 오랜 기간 사랑받아 왔고, ‘민중 시의 첫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신경림 시인의 마지막 단독시집은 2014년 출간된 ‘사진관집 이층’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새로운 시집 출간을 논의해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투병에 집중해야 했다. 이제 떠난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예술인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존경을 잇달아 표했다.
지금까지도 문단 안팎에서는 애도의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문학계 인사들, 생전 그와 연을 맺었던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이들에게 그는 맑고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신경림 시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지만, 남긴 시들을 통해 그의 올곧음을 엿볼 수 있다. 신 시인의 소식에 먹먹함을 느끼는 이들이 잘 추스르고 다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