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 니콜라 조제프(조셉) 퀴뇨 (Nicolas Joseph Cugnot)
▶ 출생-사망 / 1725.9.25 ~ 1804.10.2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공학

프랑스의 군사기술자였던 퀴뇨는 자동차의 원조 격인 증기 자동차를 최초로 만들었고, 피스톤 운동을 연구해 획기적인 발명이었던 퀴뇨의 운반차를 만들었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교통사고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운반에 도움을 주는 도구’ 구상한 퀴뇨
1725년 9월,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 뫼즈 데파르트망의 부아바콩에서 태어한 퀴뇨는 호기심과 관찰력이 남달랐던 유년시절을 보낸 후 성인이 되어 포병 장교가 되었다. 퀴뇨는 포병 장교로 근무하면서 한 가지 생각에 잠겼다. 군인들이 무거운 대포를 나르며 힘들어하고 다칠 때마다, ‘운반하는데 획기적인 도움을 주는 도구가 있으면 얼마나 안전하고 편할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1765년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이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고 증기기관의 원리를 수레에 적용한 ‘기이한’ 물건 제작에 나섰다.

- 증기기관 이용한 증기자동차 개발
증기기관은 수증기가 응축했다가 팽창하는 현상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힘을 얻는 장치이다. 퀴뇨는 이 증기기관을 이용해 자동으로 가는 자동 수레의 완성에 점차 다가갔는데, 그의 작업물을 본 주변 사람들은 마차에 익숙했던 터라 퀴뇨의 증기자동차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주변에서 퀴뇨를 괴짜로 보거나 불가능한 일에 집중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퀴뇨는 운반에 도움을 주는 도구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고 1769년 자동차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증기자동차를 최초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 신기하지만 불편했던 ‘증기자동차’
퀴뇨가 세상에 내놓은 증기자동차는 네 사람을 태우고 시속 4km의 속도로 파리 시내를 달렸다. 사람들은 퀴뇨의 증기자동차를 ‘자동으로 가는 마차’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찬사와 우려를 보냈다. 당시 퀴뇨가 만든 증기자동차는 분명 새로운 것이었지만, 기술적인 한계는 극명했던 것. 수증기를 발생하는 큰솥을 달고 다녀야 해서 속도가 느렸고 솥 무게 때문에 방향을 틀기도 어려웠으며 10∼15분마다 물을 채워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 퀴뇨의 운반차...“획기적인 발명” 찬사
퀴뇨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연구를 쉬지 않고 매진하다 1771년에는 그는 3개의 바퀴를 가지고 보일러의 증기로 2기통의 엔진을 움직이며, 대포와 화물을 뒤에서 운반할 수 있는 ‘퀴뇨의 운반차’를 만들었다. 이 역시 물의 예비가 적어서 주행거리가 짧다는 결점이 있었지만, 피스톤의 직선운동이 연속적인 회전운동으로 변환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명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현재까지 놀라운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 최초의 자동차 사고로 연구 좌절
그렇게 더 완벽한 자동차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증기자동차를 이용해 시험 주행을 하던 퀴뇨는 돌담을 크게 들이박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교통사고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퀴뇨는 그 문제를 보완하려고 연구를 진행했지만, 사고에 놀란 사람들은 퀴뇨 증기자동차가 너무 위험하다며 극구 반대를 했다. 그는 무서운 기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감옥에 갇히기까지 해야 했다. 그렇게 퀴뇨의 증기자동차는 더 이상 운행할 수 없었고, 세상에 나올 수도 없었다.  

많은 우려와 걱정 속에서 자신의 집념을 바탕으로 없던 것을 만들어 낸 퀴뇨. 비록 ‘무리수였다’, ‘완벽하지 않았다’ 등 그를 둘러싼 저평가도 많지만 누구도 퀴뇨의 증기자동차 자동차 산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퀴뇨가 만든 증기자동차는 현재 파리 국립기술공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