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끌로에와 펜디를 성공으로 이끈 디자이너, 샤넬 제국을 건설한 디자이너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셀 수가 없다. 그가 샤넬에서 선보인 리틀블랙드레스, 샤넬 퀼팅 백 등은 샤넬의 핵심 디자인 기틀을 새로 닦았고 샤넬의 새 시대를 연 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 라거펠트는 독일의 패션 디자이너로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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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옷에 대한 관심
1933년 독일 북부 도시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출신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유 사업을 했던 부친 덕에 비교적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뛰어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예술과 옷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14세 때 파리로 건너와 16세에 국제 양모 사무국 주최의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여성용 코트 부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오트 쿠튀르에서 일하게 된 라거펠트는 피에르 발망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시작하여, 끌로에의 책임 디자이너를 거쳐 프리랜서로 발렌티노, 발렌타인 등 세계 유명 브랜드를 거쳐 간다.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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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제국 건설을 주도한 라거펠트
1982년 9월 라거펠트의 샤넬 영입이 공식 선언되었다. 샤넬의 소유주들은 샤넬 하우스에도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적극적인 변화와 혁신이 필요함을 직시했고 라거펠트를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는 수년간 파리 쿠튀르에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고 치열한 기성복 세계에서 노하우를 갈고닦으며 성공을 입증해 왔기에 샤넬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 최적임자로 선택될 수 있었다.

1983년 샤넬 오트 쿠튀르 컬렉션 데뷔 무대를 통해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끌로에와의 계약이 종료된 직후 1984년부터는 샤넬의 프레타 포르테까지 감독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샤넬 제국 건설을 주도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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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펠트 디자인의 특징
라거펠트는 샤넬의 역사를 참조했지만, 존경을 표하기보다 가볍고 위트 있게 변형시키는 데에 관심을 두었고 하이패션과 거리 패션, 과거 역사와 현대 문화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혼합해 샤넬 브랜드에 재미와 자유를 부여하였다. 

라거펠트는 샤넬과 마찬가지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액세서리가 줄 수 있는 극적 효과에 주목했고 “액세서리는 재미있어야 한다. 유머가 필수다. 나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만드는 액세서리들을 만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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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샤넬에 내놓는 제품들은 상상 이상으로 기발한 것들이 엄청 많은데 예를 들어 옷을 만들 때 콘크리트를 넣어 예상치 못한 패턴을 짜 넣는다든지, 종이 용기에 가방을 넣고 포장을 해서 마트 정육점에서 산 고기 팩을 연상시키는 가방까지 상상을 초월한다.

[사진/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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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열정 디자이너
휴가도 잘 즐기지 않는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라거펠트의 오랜 성공은 패션을 넘어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온 그의 지적 토대와 탁월한 언어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야 한다.”라는 그의 굳은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고령에도 샤넬의 광고 캠페인은 본인이 직접 촬영한다고 한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오늘날 여전히 샤넬 제국을 이끌고 있으며 펜디와의 협력 관계 또한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라거펠트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 궁정 극장, 몬테/카를로 발레단 등을 위한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고 마돈나의 콘서트 투어를 위해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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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공히 파리 패션의 최고 지위에 오른 칼 라거펠트. 그는 언제나 열정과 에너지를 쏟으며 샤넬을 이끌어가고 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그. 또 어떤 창조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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