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디자인 이연선]

▶ 헤디 라머 (Hedy Lamarr)
▶ 출생-사망 / 1914년 11월 9일 - 2000년 1월 19일
▶ 출생 / 오스트리아, 미국 국적
▶ 활동분야 / 배우, 발명가
▶ 주요작품 / 영화 '알지에', 'I Take this woman', CDMA

20세기 가장 위대한 여배우 중 하나이자 CDMA를 발명한 발명가

-어린 시절부터 공학에 관심을 가지다
헤디 라머의 본명은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로 191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해에는 세계 1차대전이 시작되었지만 은행가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발레나 피아노를 배우면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헤디 라머는 시계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등 개발과 공작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곤 했다.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다
헤디 라머는 193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화 '엑스타시'를 통해 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영화 '알지에(1938)'를 통해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미녀 배우로 우뚝 서며 'I Take This Woman(1940)'와 '토티야 플랫(1942)'를 통해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다.

-공학도와 배우를 병행하다
이렇듯 헤디 라머는 여배우로서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발명가라는 타이틀도 있었다. 그녀의 첫 남편이었던 프리드리히 만들은 무기상으로 돈을 번 거부였다. 그는 헤디 라머가 배우를 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녀의 영화 필름을 불태우거나 외출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의 무기상, 과학자 모임에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마침 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모임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사상적으로 남편과 맞지 않았던 그녀는 파리로 몰래 도주 한 후 그와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헤디 라머'로 개명한 후 배우와 공학도를 병행하게 된다.

-전쟁 중 발명을 하다
헤디 라머는 세계 2차 대전 발발했을 때 어린이를 포함한 피난민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고 공학도로서 연합군을 돕기를 원했고 무선조종이 필요한 어뢰 개발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이 분야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무선조종에 보안이 필수라는 것을 인식하였고 자신의 친구인 작곡가 조지 앤틸과 함께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서 착안, 항공모함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통신을 주고받는 개념을 만들어 개발을 성공한다. 이 기술이 바로 주파수 도약(일명 FHSS)이며 그녀는 1942년 미국에 특허를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연합군의 적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 특허 자격은 몰수되었고 이후 해군에 기증했지만 효용성의 문제를 들어 반려되었다. 그러나 이 반려에는 그녀를 개발자로 보지 않고 섹스심벌로만 본 편견 때문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설이다.

-CDMA의 근간
이후 이 기술은 1950년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자 재조명 되었고 현재의 CDMA 기술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을 때에는 이미 특허가 만료 되어서 헤디 라머는 자신의 발명으로는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이후 헤디 라머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과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헌액이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작은 발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다 2000년에 플로리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헤디 라머는 화려한 배우로서의 경력에 발명가로서의 유능함이 묻힌 케이스였다. 그것이 현재에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여배우가 발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 인정이 되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고 발명가로서 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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