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 이지혜 수습기자/ 디자인 이연선]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 출생-사망 / 1899년 08월 24일 ~ 1986년 06월 14일
▶ 출생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활동분야 / 소설가, 시인, 평론가

사실주의에 기반한 단편들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이바지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가 남긴 작품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순수 창작인 시집, 단편 소설집, 산문집 등의 작품을 통해 환상적인 소재와 뛰어난 창작력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중 언어의 사용, 9세라는 어린 나이에 동화 번역으로 이어지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할머니는 영국 출신이었는데 그 영향으로 그는 집안에서 ‘조지’로 불렸으며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아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먼저 사용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영어권 문화에 대한 애정과 훗날 세계시민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어졌다.

보르헤스는 어릴 적부터 많은 책을 접했고 문학적으로도 소질이 있었다. 9세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라는 책을 에스파냐어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책의 번역자가 신문에는 ‘호르헤 보르헤스’라고 실리자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로 착각해 번역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떠난 여행, 영감의 계기가 되다
보르헤스 집안 남자들은 시력이 약화되는 유전적 질환이 있었다. 그 또한 이 유전을 피해 가지 못했는데, 훗날 8회나 되는 안과 수술을 받았음에도 호전되지 못하고 실명의 위기에 처한다. 1914년에는 그의 일가가 시력의 치료를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나고 이는 그의 삶에 있어 특별한 경험이 된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권역에서 수년간 머물며 그는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습득했다. 5년 후인 1919년에는 에스파냐에 거주하며 모국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켰고 당시 에스파냐의 아방가르드 문예 사조 ‘울트라이스모’ 즉, 극단주의에 빠져 같은 분야의 문인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간결성과 압축성이 특징인 울트라이스모 운동 등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아르헨티나 문단에 전한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또 다시 유럽으로 떠나고 체류 기간 동안 그는 다시 한 번 유럽 문화계를 몸소 체험하면서 또 다른 영감을 얻는다.

- 꾸준했던 창작의 길
보르헤스는 문화계의 큰 후원자 빅토리아 오캄포를 만나 문예지인 <수르(南)>의 편집인으로 초빙되어 빅토리아의 가족들과 함께 여러 권의 공저를 펴내기도 한다. 그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칼럼 기고, 소설 창작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1935년, 최초의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편찬하였다. 1937년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한 사립도서관의 사서가 된다. 그곳 지하 서고에서 책을 가까이하며 창작에 필요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1년 뒤 부친의 사망과 시력 약화로 인해 머리를 부딪쳐 후유증을 얻게 되는, 악재를 만난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도 그는 1939년,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를 발표하고 1941년에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1944년에는 <픽션들>을 간행한다. 이어, 1949년 <알렙>의 발표까지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선보였고 그의 입지는 점차 확고해져 갔다.

- 문학 강연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다
194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치계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보르헤스와 동년배인 군인 후안 도밍고 페론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1946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선심성 정책을 펼친다. 아르헨티나에는 독재자인 그에게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시국 선언문에 참여한 지식인 중 보르헤스만가 일종의 본보기로 선정되어 1946년에 그는 도서관 사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가축 검사관이라는 이직 명령을 받게 된다.

모욕적인 대우에 보르헤스는 결국 사직 의사를 밝히고 47세의 나이에 대중들을 위한 문학 강연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렇게 그의 이름은 또다시 널리 알려졌고 활발한 집필 활동으로 이어졌다. 1949년 단편집 <알렙>과 1952년 산문집 <또 다른 심문>, 그리고 1950년대부터 여러 작가들과 함께 공동 편저서를 공개했다.

- 정권의 변화, 보르헤스에게는 기회가 되다
페론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대두하면서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이 된다. 하지만 시력의 약화로 한 권의 책도 읽을 수 없는 상태였고 안타까운 심경을 1958년 그가 발표한 <축복의 시>에서 밝히기도 한다.

1961년 그는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제1회 국제 출판인협회 작가상을 수상하고 이를 계기로 전 세계인들의 보르헤스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수상과 강연 제의가 이어졌고 그는 이에 부응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력을 미친 보르헤스. 그의 소설이 프랑스에서 처음 번역된 이래, 그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의 대상이 되었고 푸코와 데리다 등 여러 철학자들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통념을 깨뜨리고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보르헤스의 업적은 아직까지도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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