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지난 11월 모친상으로 전 세계 팬을 안타깝게 한 오프라 윈프리. 과거 흑인을 향한 거센 선입견과 탄압으로 인해 어머니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오프라 윈프리의 비보에 많은 응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떨치는 인물로 성장한 흑인 차별 철폐의 아이콘 ‘오프라 윈프리’, 그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진 / 오프라 윈프리 SNS]

1954년 10대 미혼모였던 ‘버니타 리’는 어린 나이에 오프라 윈프리를 출산했다. 당시만 해도 흑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워낙 심했고 특히 오프라 윈프리가 태어난 미시시피 주는 흑인 차별이 유독 심한 도시였다. 당시 가정부로 일하던 그녀의 모친은 도저히 오프라 윈프리를 이곳에서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해 여섯 살 때까지 외할머니의 손에 오프라 윈프리를 맡겼다. 그 후 외할머니를 여의고 다시 어머니에 의해 밀워키 지역으로 오게 된 오프라 윈프리는 이후 어머니 홀로 아이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좌)  [사진 / 오프라 윈프리 SNS]

이러한 유년 시절을 겪으며 오프라 윈프리는 행복보다는 외로움과 차별을 먼저 느꼈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특히 그녀의 자서전을 통해 잘 나와 있는데 이러한 척박한 삶 속에서도 오프라 윈프리가 하나 꼭 품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나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녀는 차별과 불안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고 이것이 그녀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 그녀를 현재의 부호이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진 / 오프라 윈프리 SNS]

그녀는 절망의 깊은 수렁에 빠진 뒤 세상을 탓해 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그리고 그 후부터는 자신의 길을 찾는 일에 매진해 고교 시절부터 지역의 라디오 방송국에 근무하며 어두운 과거의 자신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송 진행자에 포부를 둔 오프라 윈프리는 경력을 쌓으며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갔고 드디어 시카고의 한 방송사에서 ‘에이엠 시카고’라는 이름의 토크쇼 진행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비록 폐지에 임박한 비인기 방송이었지만 오프라 윈프리는 그런 부분에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며 토크쇼에 희망을 불어 넣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 [사진 / 오프라 윈프리 SNS]

점차 인기를 얻으며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는 짧은 시간 내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서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후 오프라 윈프리는 이 토크쇼에 정말 자신의 ‘소울’을 담기 시작했고, 더욱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방송국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프로그램 명칭을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꾸는 것. 이것이 그녀가 지금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세계적 토크쇼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게 전 세계적인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한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신화가 시작되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의 인기를 바탕으로 그녀의 인지도가 점점 더 상승했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를 다른 진행자가 대체 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아이콘이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 자체가 하나의 고귀한 브랜드가 된 것.

[사진 / 오프라 윈프리 SNS]

삶 자체를 통해 ‘주변 환경이 나의 삶을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전 세계에 귀감이 된 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바닥을 찍고 더 높이 뛰어 오르며 40억 달러의 세계적인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인생의 성공 여부는 온전히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의 ‘오프라이즘’이라는 신조어 속 주인공이 되어, 멋진 인생의 표본으로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