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이지혜 수습기자]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과거에는 물질의 성질이 아닌 형상만을 보고 제품을 활용하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현대의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 수 있는 과거의 당연했던 행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출처_Wikimedia Commons]

첫 번째. 방사능 물질로 만든 화장품, ‘Radior’의 화장품

1898년 퀴리 부인은 방사능 물질 라듐을 발견했다. 라듐의 등장에 과학계는 열광했고 화학, 의료, 산업 분야 등 사회 각 분야에도 큰 파장이 있었다. 이 방사성 물질은 스스로 빛을 내는 성질 때문에 화장품 제조에도 퍼져 나갔는데, 1971년 영국의 회사 Radior에서는 염화토륨과 브롬화 라듐 성분이 포함된 클렌징크림, 콤팩트 파우더, 립스틱, 치약, 비누 등 다양한 방사성 화장품을 출시하였다.

그러나 이 제품들을 사용한 여성들이 백혈병이나 암 등으로 사망하자 1930년대가 되어서야 그 위험성이 인정된다. 지금은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발견할 당시에는 바로 발견되는 증상이 아니다 보니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열광했을 것이다. 인체에 해로운 방사성 물질이 “Beauty Secret”이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출처_Wikimedia Commons]

두 번째. 고인(故人)과 함께 기념사진? ‘포스트 모르템’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면 사진 기사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취했다. 당시 장례준비보다 사진 기사를 먼저 부른 이유는 고인의 모습을 남기는 것을 하나의 관례로 여겼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르템 사진(Post-Morterm Photography)은 고인과 가족 구성원이 함께 찍거나 고인 단독으로 찍는 형식이었는데, 잠든 모습으로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고 최대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것처럼 연출하여 촬영하기도 했다.

사지가 굳어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고인의 사진을 남기겠다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들은 인체를 받쳐주는 특수한 스탠드를 제조하였고 이 기구의 도움으로 고인을 의자 위에 앉히거나 두 발을 딛고 서서 찍을 수 있도록 자세를 조정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사진 기사와 카메라 장비를 대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장례를 치를 때만큼이나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다. 사진 촬영은 사치와도 같아서, 그리 기회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이처럼 특수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출처_Wikimedia Commons]

세 번째. 피를 콸콸 쏟아 내는 게 치료라니...‘방혈’

건강한 혈액이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반대로 생각했나 보다. 혈액을 방출시킴으로써 치료를 하고자 하는 ‘방혈’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의학적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치료법은 3000년도 더 된 이집트 역사에 처음 등장하여 19세기 후반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

방혈은 팔꿈치나 발목 등의 부위에 상처를 내 한 번에 1리터, 많게는 2.5리터까지 피를 뽑아내는 치료법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방혈이 여드름, 천연두, 천식 등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다고 맹신했다. 때문에 과거에는 이발사들이 손님을 대상으로 방혈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18-19세기의 의사들이 환자가 기절할 때까지 피를 뽑아내기도 했다. 심지어 1789-1797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역임했던 조지 워싱턴도 방혈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따름이다.

과거에는 당연시 여겼던 충격적인 행위들. 이는 미신이나 문화, 관련 지식의 부족 등에 의해 행해졌던 것들이라 마냥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재 하는 행동들 중 무엇인가는 미래의 사람들이 봤을 때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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