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54년 5월 20일 치러졌던 제3대 총선에서는 이승만의 자유당이 민주국민당을 눌렀지만 무소속 의원들의 비율이 여전히 높았다. 이에 1954년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2차 개헌)

개헌을 위해서는 재적의원 203명 중 3분의 2가 찬성을 해야 통과가 된다. 그런데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 되므로 136명이 찬성을 해야 하는데 이승만 정권은 소수점 이하는 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초유의 헌정을 농락하는 논리로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거듭되는 헌정유린과 폭압통치에 맞서 민국당(한민당의 후신)을 비롯한 보수야당계열은 반독재전선인 ‘범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54년 사사오입 헌법개정 이후 1955년에 이르러 이들은 ‘호헌동지회’를 원내교섭단체로 등록시켰는데 여기에는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소속의원 등 60명이 포함되었다. 

민국당계열의 보수파인 자유민주파와 혁신파인 민주대동파가 범야세력의 결집을 놓고 오랜 논쟁 끝에 전 민국당 세력을 주축으로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호헌동지회에서 이탈한 ‘비자유당계’, ‘비민주당계’ 인사들은 진보당 결성을 위한 발기대회를 갖고 새롭게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는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계열,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우파 및 기타 장건상, 정화암 등의 원로들과 조향록 등 진보적 종교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단정 진보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다. 

1956년 5월 15일 직선제 선거가 치러지고 이승마은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의원들로 이루어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못갈겠다, (이승만)갈아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방 유세 도중 열차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러나 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이승만의 인기는 농촌을 제외한 도시지역에서 급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화통일과 혁신노선을 내세운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전체 유효표의 30%를 차지하는 등 약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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