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과 농지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민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이로 인해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무소속 의원들이 많이 당선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도 중대한 실정을 행했다.

1951년 2월 10일 국군은 경남 거창에서 양민 500명을 공산군으로 오인하여 사살하였고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고급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돌려 압록강에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사망하기도 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전쟁 중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한국민주당과 결별하고 국민회, 대한청년당, 노동총연맹, 농민총연맹, 대한부인회 등 우익단체를 토대로 여당인 자유당을 조직하게 된다.

1952년 5월 이승만은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헌 헌법으로는 대통령에 재선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직선제로의 헌법 개정을 위해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공비 토벌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백골단, 땃벌대 등 폭력 조직을 만들어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 그리고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 47명에 대해서는 국제 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구실로 체포, 구속하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속칭 발췌개헌)을 통과시켰다. 경찰과 군대, 백골단 등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통과된 새 헌법에 기초하여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함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2. 8. 5)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표면적으로는 대통령 출마를 고사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출마탄원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의도이자 라이벌인 이범석을 거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결국 전국적인 이승만의 재출마 요구시위가 이어졌고 그는 마지못해 이에 응하는 식으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무명의 무소속 후보 함태영을 지명하여 부통령에 올려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이로써 이승만의 독재를 위한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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