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이에 맞서 북한에서도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시행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한반도는 어렵게 일제에게 해방을 이루었지만 강요된 미소의 외압으로 인해 분단국가가 성립되고 말아버렸다. 

남한은 이런 와중에 제주도 4.3 사건으로 인해 내륙 곳곳으로 흩어진 반란군을 처리하는 일과 이승만 정권의 2대 총선 패배 위기, 주한미군의 철수 등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또한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은 태평양 지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하여 한반도는 공산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런 남한의 어려운 사정과는 반대로 북한의 국력은 급격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이 김일성 정권을 강력하게 지원하였고 이미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부터 북한을 ‘민주기지’로 발전시켜 남한을 적화통일 시키려고 하였고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격렬해지자 훈련된 게릴라를 직접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무기나 물자, 병력면에서 남한을 월등하게 앞지르게 되면서 북한의 침략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우수한 무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북한군이 남침하여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에 한국과 이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고 있던 미국이 26일 즉각 유엔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비롯한 10개국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특히 유엔군의 주력부대인 미군은 월등한 전력을 앞세워 9월 25일 서울을 탈환한 후 10월 1일에는 38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자 1950년 10월 유엔군의 만주진격을 우려한 중국이 10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전세는 다시 뒤집어졌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4후퇴)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평택과 오산 지역까지 후퇴하였지만 다시 총공세를 시도하여 1951년 3월 14일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