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연선]

▶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
▶ 출생-사망 / 1935.1.8 ~ 1977.8.16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대중음악, 영화

미국의 전설로 남은 가수 겸 배우. 로큰롤을 미국의 대표적인 장르로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 로큰롤의 왕(King of rock & roll) 로 불린다.

-트럭 운전수,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음반을 만들다
1953년 여름, 트럭 운전수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자신이 부른 노래 음반을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드리기 위해 미국 테네시 주의 선 레코드를 찾았다. 당시 선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는 4달러만 내면 누구나 자작음반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는 노래 두 곡을 불렀고 그 노래는 선 레코드의 사장인 샘 필립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흑인 전유물이었던 로큰롤에 백인의 바람이 불다
로큰롤은 노골적인 성 묘사, 격렬한 춤, 지르는 듯한 창법과 반항적인 이미지로 인해 백인들에게는 천한 음악이라며 외면을 받는 장르였다. 그러나 샘 필립스는 이런 로큰롤을 흑인처럼 부를 수 있는 백인 가수가 있다면 엄청나게 시장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했고 1년 전 음반을 만들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렸다.

1954년 7월 댓츠 올 라이트(That's All Right)를 녹음해 데뷔싱글로 발표한 그는 1956년 1월 싱글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을 발표, 1956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로큰롤을 세계적인 음악장르로 끌어올렸다. 그해 3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톰 파커 대령과 정식으로 매니저 계약을 체결하여 데뷔앨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1956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기록했고 또한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 첫 번째 로큰롤 앨범이 되었다.

- 영화배우로 우뚝 서다
1956년 10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싱글 ‘러브 미 텐더’를 발표해 1956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며 히트시켰고 그해 11월 노래와 같은 이름의 영화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1956)에 주연으로 데뷔해 총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로서의 삶도 시작된다. 영화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에 편승되어 흥행은 했지만 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 군복무, 인기 하락, 그리고 죽음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아 서독의 미군 기지로 배치되어 18개월 동안 근무를 하였고 1960년 3월 2일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전역했다. 군복무를 마친 엘비스는 반항아적인 이미지가 많이 사라져 장년층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반대로 폭발적인 팬덤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엘비스는 앨범활동 보다는 영화 촬영 쪽에 더욱 전념하였고 촬영이 없을 때에는 멤피스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는 중에 음악계에는 비틀즈나 지미 헨드릭스 등의 엄청난 신예들이 등장해 인기를 쓸어갔고 앨비스의 인기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프리실라와 결혼하여 다음 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를 낳는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1972년에 끝이 나버리고 각성제 등의 약물을 남용하여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결국 1977년 8월 16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갔지만 결국 사망하게 된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관계자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망하지 않고 은거를 한다거나 외계인이 잡아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엘비스는 로큰롤을 세계적인 장르로 만든 ‘로큰롤의 제왕’이며 불세출의 슈퍼스타이다. 죽음까지 신비롭게 만든 이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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