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유엔에서는 1947년 9월에 한국문제가 상정된 이래 미국과 소련 간의 공방이 오가다 본회의에서 소련의 양군 철수안이 부결되고 미국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안이 가결되었다(1947.09.11). 이 결의에서는 한국의 총선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고 선거에 의해 제헌국회를 구성한 후 90일 이내의 완전철병을 위해 이 국회가 점령국들과 협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자주연맹’(1947.12.20.)을 결성하여 좌우합작 운동을 계승하였고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우익진영 일반에서는 한국독립당(김구)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국제연합으로의 이관결의는 필연적으로 남북의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음으로 미, 소 양군 철수 후 남북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하여 총선을 통해 통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공동담화를 발표하였다.(1947.11.18.)

1948년 1월 12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해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임시위원단이 우크라이나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소련측의 거부로 북한 입북이 거부되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북쪽의 길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내고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사설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유엔은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이 거부되자 소총회의 결의를 통해 남한지역만의 총선을 실시한다는 단독선거안을 통과시켜버렸다,(1948.02.16.) 이로 인해 미군정은 3월 1일 남한만의 총선을 5월 10일에 실시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에는 경찰과 서북청년단(극우 단체)이 제주도민을 탄압하자 제주도 남로당지부를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좌파에 대한 폭력적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미군정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이에 미군정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이를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포함하여 전체 제주도민의 10%에 달하는 3만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발발 1년여만인 1949년 봄에서야 종결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는 5.10 총선거가 무산되었다.

그리고 1948.04.19.~30까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려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등 4김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외국군대 즉시 철수와 외국군 철수 후 내전 발생 부인, 남한 단독선거 반대 등의 내용이 합의되었지만 이들이 불참한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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