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태웅/디자인 이연선]

▶말론 브란도 (Marlon Brando)
▶출생-사망 / 1924.04.03. ~ 2004.07.01.
▶국적 / 미국
▶활동분야 / 영화배우

시대의 반항아 ‘말론 브란도’, 20세기 미국 영화계를 풍미한 메소드 연기의 표본

- 가정사에 의해 완성된 ‘반항의 아이콘’
말론 브란도는 20세기 미국 영화계에서 ‘반항의 아이콘’으로 유명하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권위에 도전해 성공하는 것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밝혔을 정도로 자신의 반항아적인 성향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1924년 4월 3일 미국의 중서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말론 브란도는 유년시절을 바람기 많은 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가정사가 그가 반항적인 성향을 갖게 된 원인이라고 꼽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은 그의 자서전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말론 브란도의 이러한 성향은 훗날 미국 영화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메소드 연기’의 표본으로 거듭나다
말론 브란도는 육군사관학교에 잠시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후, 19살이 되던 해 배우라는 꿈 하나로 뉴욕 브로드웨이로 떠났다. 1944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그는 점차 연기 내공을 쌓아 나갔고 제임스 딘,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등 미국의 정상급 배우들을 배출한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가면서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다.

액터스 스튜디오는 1947년 뉴욕에 설립된 연기자 그룹으로 이른바 ‘메소드 연기’ 방법을 만들고 배우들에게 가르친 곳이다. 말론 브란도 또한 이곳에 들어간 이후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는 1950년 영화 '더 멘(The Men)'에서 영화배우로서 데뷔하였고 다음 작품인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스탠리’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는다.

- 명작 <대부>의 탄생, ‘사상 최대의 성공작’ 명예까지
배우 ‘말론 브란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코 영화 <대부:The Godfather>일 것이다. 1972년 3월 미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처음부터 큰 호응을 얻지는 못 했다. 마피아 세계의 무법성과 잔혹함 그리고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로 영화 <대부>를 전국적으로 배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모이면 이 영화만은 꼭 봐야 한다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부>는 미국 내의 배급 수수료로 8,500만 달러를, 해외시장에서는 약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마피아 대부 돈 콜리오네를 연기한 말론 브란도는 물론이고 영화 속 모든 연기자, 각본, 연출 모든 면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때부터 평론가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가졌던 ‘사상 최대의 성공작’이라는 명예를 <대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 아카데미상 수상 거부한 ‘말론 브란도’, 미국 원주민에 대해 돌아보다
영화 <대부>를 선보인 이듬해 3월,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메소드 연기의 표본을 보여준 말론 브란도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수상자였던 말론 브란도는 시상식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그를 대신해 단상에 오른 아메리카 원주민 사친 리틀페더 공주는 15쪽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200년 동안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그들을 속여 그들의 땅에서 쫓아냈고 … 그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즉, 말론 브란도는 미국과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원주민을 다룬 방식에 항의하며 아카데미상을 거부한 것이다. 3년 후 그는 ‘미국원주민운동(AIM)'의 창립에 관여하며 미국 사회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 암울한 말년기, 하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말론 브란도는 그가 연기한 영화들을 통해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상, 칸 영화제 등에서 수많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았던 그의 연기생활과는 다르게 그의 사생활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러 번의 결혼 실패, 친 아들의 아내 살해와 자살 등 그의 말년기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결국 우울증과 폭식,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말론 브란도는 80년대 이후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고 은둔생활을 했다.

2001년 영화 <스코어>로 깜짝 복귀한 그는 3년 뒤 폐질환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말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계의 영향력은 1999년 세기말 간행된 타임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면서 끝까지 인정받았다.  

영화 속 역할이 곧 자신이 되는 메소드 연기, 그에게 연기는 곧 자신의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히스레저, 크리스천 베일 등과 같은 배우들의 배역에 대한 과잉 몰입이 하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면서 메소드 연기를 지양하는 면도 없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연기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친 그를 찬사하지 않을 사람은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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