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태평양전쟁(1941) 초기에 일본은 엄청난 위세를 보이며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싱가포르 등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기세가 크게 꺾였고 소련까지 참전하여 압박하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35년에 걸친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곧바로 건국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조선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1945.08.15)하고 본격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다. 건준은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대를 설치하였고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건준은 초기에 여윤형 계열의 중도좌파와 안재홍 계열의 중도우파의 연합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함상훈, 이용설 등 우파와 정백, 이강국 등 좌파가 가세였다. 그러다 9월 3일 2차 조직개편 때 좌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우파와 중도우파가 탈퇴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9월 5일 얄타 회담의 합의에 따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게 되자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지방의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주석으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이승만을 추대하였고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허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한편 인천을 통해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점령군의 자격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게 된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항복문서 제 5조의 “일본의 문무관은 면직되지 않는 한 현직에 유임한다”는 내용을 들어 조선 총독부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한국민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철회하였고 친미적인 우익정부 수립을 후원하기 위해 송진우, 김성수 등 일본이나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언론, 교육, 법조계에 몸을 담았던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등 친일파 등용 정책을 썼다.

또한 미군정은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의 내용이 담긴 군정법령 제 2호에 따라 국공유 재산과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 관리하였다. 이로써 미군정은 인민위원회가 일본인 소유지와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토지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였고 신한공사(1946.02.21.)를 설립하여 이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던 많은 기업이 원료와 기술, 자본 부족의 어려움으로 도산하는 경우가 발생해 물가가 치솟고 심각한 생필품 부족 현상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등 미군정의 경제 정책은 실패를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9월 총파업(1946.09.23.), 10월 항쟁(1946.10) 등 노동자들과 농민의 시위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는 등 한국은 미군정에 의해 일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