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독립 외교 활동 등을 벌여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는 백범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단체들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여 지지기반을 강화함과 동시에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 수립과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를 채택하여 제정하고 공포하게 된다. 

그리고 1942년에는 중국 화북 지방 공산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김두봉을 주석으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산하 정규군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이들은 토지 국유제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944년 8월에는 사회주의계 우파인 여운형과 민족주의계 좌파인 안재홍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가 패망하기 전 국내 서울에서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좌익과 우익이 모두 참여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 때 일제의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건국 강령이 반포되었다. 

이처럼 건국 준비 단체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과 토지 국유화를 바탕으로 하여 정당한 절차를 통한 토지 분배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국제에서도 한국의 독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43년 11월 일본과 전쟁중이던 미국, 영국, 중국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일정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는 카이로 회담을 가졌고 1945년 2월에는 미국과 영국, 소련이 소련의 얄타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 양군이 한국의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할 것을 제안하는 얄타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5년 7월 광복 직전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 등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카이로 회담의 내용을 재확인 하는 포츠담 선언을 가지는 등 한국의 독립과 열강들의 머리싸움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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