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30년대 우리 문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오히려 더욱 창의적이고 민족적 색체가 강한 작품을 창조해 냈다.

이를 그냥 두고 볼 일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서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고 조선문인협회(1939), 조선음악가협회(1941), 조선연극협회(1940) 등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과 식민 통치의 찬양에 이용하였다. 

이에 서정주는 ‘오장 마쓰이 히데오 승가’를, 노천명은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일제 찬양 시를 지었고 이 외에도 이광수, 김동인, 김동환, 주요한, 모윤숙 등의 문학가들이 친일 행적을 보이거나 친일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미술은 근대적인 모습을 서서히 띄기 시작했다. 안중식은 조석진과 함께 한국 전통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작품은 그의 스승인 장승엽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중국화를 모방한 관념적 청록산수나 고사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인 이중섭이 떠올랐다. 그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향토적이며 개성이 물씬 풍겨나는 화풍을 보였다. 그는 한국에 서구 근대화 된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소’, ‘횐 소’ 등의 작품은 선화로서 대한민국 미술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음악 역시 근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이라는 대표 작품이 있는 음악가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해 왔으며 1936년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홍난파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등 여러 편의 가곡과 ‘오빠 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으며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고 현제명은 ‘고향 생각’, ‘그집 앞’, ‘나물 캐는 처녀’, ‘희망의 나라로’ 등의 곡을 발표하였지만 이들은 추후 친일 행각을 보여 작품까지 부정되는 논란을 겪게 된다.

홍난파 등 일제에 굴복해 친일 행적을 보인 인사들 중에는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한다. 실제로 홍난파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국가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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