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물산장려 운동은 애초에 조선 총독부가 방조를 하여 반짝 활성화 되는 듯 했지만 결국 일제와 타협하는 등 자본의 원리에 굴복하는 민족기업이 발생하면서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민족주의자들은 물질적인 물산장려운동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높은 지적 수준이 곧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2월,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실시하여 법적으로는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에 한규설, 이상재 등 91명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민립대학설립기성회(1923.03.30.)’를 조직한다. 이들은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월씩’이라는 구호를 통해 대학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은 이 운동을 비판하였으며 민족 설립 대학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의 방해와 좋지 못한 경제 사정으로 인한 모금의 부족으로 실패하였고 일제는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1924)’을 설립하여 극소수의 한국인을 입학시켜 한국인의 고등교육열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지방 유지나 청년 단체가 주도하여 문맹을 퇴치하자는 야학 운동이 전개되어  (1920~1925) 노동자, 농민, 아동, 여자야학 등 다양한 계층이 이에 동참하였고 언론사들도 문자보급 운동을 활발히 하였다.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 하에 문맹퇴치운동(1926~1935)을 전개하였고 동아일보는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브나로드 운동(1931)’을 주도하였다.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라는 러시아 말로 원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의 구호다. 이는 추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여 ‘계몽운동’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며 문맹 퇴치뿐 아니라 구습과 미신 타파,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야학, 강습소를 설치하고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사상을 배양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 운동은 일제도, 우리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에 숱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진행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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