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칼럼니스트]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럽다던 대한민국이 어찌 이 지경이 됐습니까? 아프리카 어느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선진국 운운하는 대한민국에서 겪었으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20여 년 전, 우리는 이 같은 사고를, 아니 인재(人災)를 숱하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직도 차디찬 바다 속에 갇혀 있는 저 아이들처럼 대한민국의 자존심은 바다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은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는 곪은 나라, 화려한 물질문명 속에 빗나간 정신문명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는 아닌지요? 생활은 공동체적으로 하나 마음은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에 무슨 정의가, 무슨 공공선이 실현될까요?

저 후안무치한 세월호 사람들을 누가 잉태했습니까? 법과 원칙을 어기는 것을 능사로 아는 사회에서, 학교마저 종교마저 더불어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 달리라고 가르치는 나라에서 세월호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는 바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요, 세월호 선원들은 우리 자신의 거울인 것입니다.

지금은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의 교통사고에서 우리는 불법과 탈법이 판치는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습니다. 1인당 GDP 면에서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도 우리의 품격과 법질서는 후진국 수준입니다. 온 사회가 ‘부정과 부조리의 네트워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근대적인 연고주의로 뭉쳐 있습니다.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회 전반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나홀로 고고해 봐야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세월호에서도 우리는 ‘부정의 검은 그림자’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관료 및 정치인들과 업자들의 결탁이 어찌 세월호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우리는 과연 몰랐습니까? 모두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상입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금주의와 배타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그런 정의로운 목소리는 ‘찻잔 속의 태풍’일 뿐입니다.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어딘가를 향해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그대로입니다.

왜냐하면 국민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월호에서도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람들이 우선 엄청난 법과 도덕적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저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는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세월호의 과적(過積)은 우리 사회 적폐의 상징입니다.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근대화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사회입니다. 어쩌면 ‘압축 비약의 근대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어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름의 성공 신화를 썼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실제로 그럴 만한 현상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드웨어에 비해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가 뒤처지는 나라임을 우리는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물질의 성장에 비견될 만한 정신적 성숙에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도 있었던 이웃에 대한 배려 같은 공동체 정신은 오히려 실종되어버렸습니다. 아파트 층간 소음 분쟁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공동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와 정보화로 타인과의 접촉면은 넓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필수적인 관용과 양보의 미덕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겪게 되는 이웃들(?)과의 황당한 조우 장면이야말로 ‘공동체로 살아야 하지만 공동체정신은 실종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부모가 되기 전에 부모로서의 소양 교육을 받아야 하듯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려면 그에 맞는 학습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이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오로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배우거나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는 운명공동체입니다. 거기서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선원들은 그 책임을 망각했거나 방기했습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없던 사람들에게 수백 명의 목숨을 맡긴 셈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국가는, 한 사회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운명공동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개방된다 하더라도 국경은 엄존하고 있고 국가 공동체의 소중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거기에 맞는 국민정신, 시민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순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제대로 가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사롭게 어기는 법질서가, 탈법과 불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지금도 교통사고로 1년에 수천 명이 죽고 있습니다. 또 나의 탈세로 안전 등, 꼭 필요한 일에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를 통해 이런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와 유사한 사고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선원들만 손가락질한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와 공직자들이 강한 책임을 느껴야겠지만, 이것이 우리 자신의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전가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월호 사고를 반정부 투쟁 혹은 반체제 투쟁의 소재로 삼으려는 일부 불순한 사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소중함이나 대한민국의 안전보다는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차분하게 여러 가지 원인을 규명하고 각각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책임 소재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의 황폐한 정신문명과 법치주의의 경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참사를 겪고도 또 다시 몇몇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끝나버린다면 대한민국은 ‘안전 후진국’ ‘법치 후진국’으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일탈을, 나의 무관심을, 나의 이기심을 자책하는 계기로 삼을 때만이 희망의 싹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호의 선장으로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번 사고와 그 수습 과정에서 나타난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심각성에 대해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일부 공직자들은 세월호 선원들 못지않게 부도덕하고 무책임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박 대통령이 공언했듯이 공직사회를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기에 모든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기능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각 분야에 적당한 사람을 기용하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이것은 현상유지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적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요소요소에 혁신가들이 배치되어야 합니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는 당면한 기대에 부응할 수가 없고 창조 정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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