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이연선]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
▶ 출생-사망 / 1397(추정) ~ 1468.2.3.
▶ 국적 / 독일
▶ 활동분야 / 인쇄

기존에 발명된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근대화 시킨 인물로, 1450년경 인쇄공장을 만들어 연관된 기술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후 <구텐베르크 성서>를 출판하며 근대 인쇄술의 보급은 물론 종교 개혁까지 그 기반이 되었다.

- 아버지로부터 영향 받은 인쇄술 연구

구텐베르크는 조폐국 금화 제조를 하던 아버지의 기술을 어깨 너머로 경험하면서 기존 활판 인쇄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그는 1434년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인쇄술 근대화 연구에 들어갔다. 특히 구텐베르크는 동전 모양의 금덩어리 하나하나에 펀치로 때려 문양을 새기던 아버지의 금화 제조술을 인쇄술에 접목시켜 나갔다. 그렇게 그의 연구는 점차 발전을 거듭해 기존에 한 글자만 오류가 생겨도 판 전체를 새로 만들어야 했던 기존의 인쇄방식의 단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인쇄용 금속활자 하나하나를 별도로 조판하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인쇄술과 달리 자유로운 수정과 배치가 가능한 이동식 활자로 불리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 오늘날 인쇄기(press)의 출현, 끊이지 않는 연구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만든 이동식 활자를 인쇄 틀에 놓고 종이에 강하게 압착하는 방식으로 찍어냈다. 이러한 방식은 근대화 인쇄 방식으로 프레스라 불리는 오늘날 인쇄술 방식의 뿌리가 된 기술로 여겨진다. 이러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소량 인쇄만 가능하던 기존의 단점을 명쾌하게 개선한 방식으로 인정받으며 점차 쓰임새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흔히 현재 우리가 문서 작업할 때 조정하는 자간, 행간 등 글자의 배치 조정은 물론, 잉크의 농도와 용지의 두께에 따라 인쇄의 품질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여러 단점을 찾아 보완하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 서적의 개혁 불러와

연구를 거듭해 많은 성과를 이룩한 구텐베르크는 144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인쇄소를 차렸다. 당시 특히 인쇄 기술이 절실하고, 수요가 많던 교회의 예배서 등 서적을 제작해야겠다는 목표가 그의 귀향 결심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게 구텐베르크는 교회 관계자와 동업해 ‘구텐베르크 성서’, ‘42행 성서’ 등을 인쇄하게 되었다. 이는 최초의 대량 인쇄본 책자 중 하나로 손꼽히며, 특히 글자의 배치와 디자인 등에 있어 극찬을 받으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구텐배르크는 양질의 예술적 가치가 높은 또 정확한 내용의 성서 만들기에 큰 포부를 두고 인쇄업에 박차를 가한다. 현재 까지도 구텐베르크의 성서들은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무렵 540만 달러에 경매되기도 했다.

- 동업자의 배신, 쓸쓸한 퇴장

승승장구하던 구텐베르크. 하지만 그는 일말의 사건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함께 인쇄소를 차렸던 동업자로부터 배신 당한 것이다. 사업 6년 만에 돌연 동업자인 푸스트가 자신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며 소송을 걸었고, 영악한 푸스트의 승소로 결국 인쇄소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구텐베르크의 꿈이 담겼던 인쇄소는 더 많은 인정을 받고 번창하게 되었지만 구텐베르크는 재기하지 못한 채 참혹한 노년을 맞이해야 했다. 심지어 먼 훗날에 가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 기술을 훔쳤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후세에 거짓이라 판단하는 학자들이 대다수) 1468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이미 있던 인쇄술의 근대화를 불러온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기술. 물론 당시 중국과 한국의 활자기술이 더 먼저 개발되었지만, 자유로운 사상의 서양에서 꽃피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근대화에 더욱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자간과 행간과 글자에 디자인을 도입하는 등 현대 인쇄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그의 업적이 현시대에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심심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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