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3.1 운동은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구미 열강은 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이들에게서 독립의 가능성을 기대했던 민족주의자들은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타국에 의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은 구한말 애국 계몽기에 보였던 실력 양성 운동을 통해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진화론을 사상적인 배경으로 하여 ‘선실력 양성론’을 토대로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과 문맹퇴치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추진하게 된다.

1920년~1923년에는 이런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이 실행되었다. 그 배경으로는 1920년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철폐되면서 회사 설립 요건이 완화되었으며 이 시기에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한 민족 기업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령 철폐 자체가 일본 자본가의 수월한 진출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규제가 심하여 대규모의 회사보다는 소규모의 공장 건설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민족기업으로는 김성수가 지주와 거상의 자본을 모아 설립한 경성방직 주식회사(서울)이 있었으며 서민들의 소자본을 모아 설립한 메리야스 공장(평양), 고무신 공장(부산)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20년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무역에서 면직업과 주류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관세가 면제가 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민족자본가들은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평양물산장려회(1920.08)를 설립한 것을 필두로 하여 서울에서는 조선물산장려회(1922)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조선인이 만든 것을 입고, 먹고, 쓰자’는 구호 아래 자급자족과 국산품 애용, 소비절약과 금주, 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작회(1923)는 국산품 애용과 자급자족을 외치며 본격적 활동을 전개하였고 지방에서는 처음부터 일본 상품에 대한 배척 운동(日貨排斥)의 성격을 띄며 도시의 물산장려운동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은 생산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개되어 시장 가격만 올리는 결과를 낳았고 대부분의 이득은 상인이나 자본가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를 경시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인해 사실상 물산장려운동은 중단되었으며 민족기업으로 출발하였던 경성방직 주식회사 등이 일제와 타협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다. 

민족의 실력을 쌓아 일제에 대항하자며 시작이 거창했던 물산장려운동.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대에 규제와 탄압으로 현실과 타협하여 그야말로 용두사미로 끝난 안타까운 운동이 아닐 수 없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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