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중국은 1국 1당의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에 만주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동만 지역의 일부 농민과 한인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은 가을걷이와 춘궁기 때 중국인이나 친일 지주들로부터 쌀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추수, 춘황 투쟁(1931~1932)’을 전개했고 만주지역 중국 공산당이 이끈 적위대 등 여러 유격대가 결성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항일 유격대가 성과를 거두자 중국 공산당은 항일민족통일전선 성격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고 (1933.1) 1935년 8월 1일 일어난 시안사건(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이었던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 시안 화청지에서 납치, 구금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수립되면서 각 당파와 민족 및 모든 계층을 망라한 한일연합군의 조직을 발표함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한일연군으로 재편성되었다. 

동북한일연군은 3로 11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제1로군 1, 2군과 제2로군 4,5,7,8군, 제3로군 3, 9군의 주요 지휘관 중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특히 제1로군 2군 6사장은 김일성이었는데 이 부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군대라 하여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의 6사가 포함된 제2군은 약 2000명의 병력 중 절반이 조선인이었으며 주요 간부로는 오성륜과 이상준, 엄수명 등이 있었고 이들은 1936년 조국광복회를 만든다.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는 압록강을 넘어 함경남도 갑산군 해산진에 있는 경찰주재소와 소방서 면사부소 등을 습격하고 보천보에 침투하여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는 보천보 전투(1937. 6. 4)로 불리며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국내에도 크게 알려지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부군의 탄압을 피해 연안에 도착했을 당시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조선인은 10여명 가량이 있었다. 중공의 항일대오에서 활동한 무오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최창익, 한빈 등이 공산주의자들, 국민장 정부 구역에서 이동해 온 박효삼 등의 민족혁명당의 주요 구성원과 조선의용대 주력 부대들이 합류하여 항일군정대학이나 중앙당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팔로군 및 신사군에 배치된다. 이들은 중국의 혁명이 조국의 해방의 열쇠라 여겼고 조선 민족의 해방을 표방하였다. 

결국 조선인 공산당원들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1. 1)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산서성 진동남 태항산에 결성하였고 홍하를 건너 태항산에 도착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된다. 그리고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 건설’을 표방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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