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위세를 떨치고 있던 일본군은 청산리 대첩 등에서 독립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참패를 당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무차별적인 한인 학살 작전을 실행한다(간도참변/경신참변_1920년 10월~1921년 4월). 

일본군은 서북간도 지역의 한국인 촌락을 습격하여 남자는 살해하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했다. 

이런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무장 독립군들은 강대국인 러시아의 지원과 독립군의 힘을 집결하기 위해 러시아의 자유시(스바보드니)로 집결하게 된다(1921년 3월).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 사이에서 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난다.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중 러시아파 고려공산당의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간도지역에서 넘어간 독립군 부대들은 이 중 상해파의 전한군사위원회를 지지하며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예속을 거부하였고 자유대대를 강제로 편입시켜 상해파의 승리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자유대대의 일부는 러시아에 통수권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러시아는 임시고려군정의회(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시빌리는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여 지휘권을 양도하라고 하였다. 이에 홍범도의 부대를 비롯한 일부의 부대는 그에 따랐지만 사할린의용대(전 이항부대)는 이를 거부하였고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키로 결정하였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는 사할린의용대에 복종을 종용했지만 사할린의용대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제29연대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를 당하여 864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어 일부는 러시아 내 한인 사회주의 세력에 협력하거나 포로가 되어 그곳에 남게 되고, 나머지는 병력을 수습하여 간도 지역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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