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1937년 7월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북경(베이징)과 텐진 등 북부의 주요도시들을 비교적 손쉽게 점령하여 일본군 수뇌부는 3개월 만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며 큰소리를 칠 정도로 사기가 올라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장제스의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생각보다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분노에 찬 일본군은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진군했다.

이에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며 결사항전을 선언했는데 정작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으로 쳐들어오자 탕셩즈는 휘하부대와 함께 전날 가장 빠르게 도망을 가 버렸다. 결국 피난을 가지 못한 50~60만 명의 난징 시민들과 지휘관을 잃은 군인들은 공황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남아있는 중국군 병사들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투항한 중국군 포로를 죽이고 젊은 남자들을 모조리 끌고 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난징대학살의 폐해(출처/위키피디아)

일본군은 처음에는 기관총으로 사살하다 총알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총검술로 죽이거나 산채로 땅에 매장 하는 등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여성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간해 약 8만 명 정도의 여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군은 또한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하다 죽였으며 심지어 가족을 죽이기 전에는 근친상간을 강요하는 등 짐승만도 못 한 비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였다.

일본군의 이런 학살과 집단 강간은 1938년 2월까지 6주가 넘게 계속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전 후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와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가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했고 만행을 저질렀던 6사단의 다니 히사오 중장이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 위반과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아 공개 총살을 당하지만 주요범죄자들은 단 한 명도 법정에 조차 서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그 자체를 부정하여 일본 국민들은 난징대학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1971년 아사히신문 기자가 난징대학살에 대해 최초로 글을 투고 하여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이 기자는 직후 일본의 우익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공격을 받아야 했다. 

전범국가로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막대한 피해와 절망감과 슬픔과 공포를 안겨준 일본. 누구나 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가 아닌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싶다. 80주기를 맞아 희생된 난징 시민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