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광웅] 60년대 북한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다. 그 중 유명한 숙청사건이 있다. 바로 ‘박금철, 이효순’사건과 ‘김창봉, 허봉학’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 북한에 어떤 영향들을 준 것인지.

당시 실제 2인자는 김정일이 아니었음에도 김정일이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제7조 제8항인 ‘세도, 관료주의, 주관주의, 형식주의, 본위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업 방법과 작풍을 철저히 배격하여야 한다’에서 배척해야 할 대상에 '세도(勢道)'를 제일 앞에 추가했다는.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가?

‘세도’가 맨 앞에 추가한 것은 김정은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드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그 어떤 행동들도 사전에 차단시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역설적으로 북한 간부층들의 체제 이반 심리와 기강 해이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유일체제 공고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지도부가 유일체제를 형성해 나가면서 중시한 것은 인민의 동의를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은 김일성 그룹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학습을 통해 지도자와 인민의 유대감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인민들은 항일유격대의 삶을 현재적 실천과정에서 구현하도록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일체제의 진행과정에 일련의 ‘이단적’ 흐름이 등장하였다. 김일성 지도부는 이에 적극 대처하고자 1967년 5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전 사회적으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을 전면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리고 유일체제 확립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당내 일부 지도층 인사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숙청 대상은 일제시기 빨치산 그룹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던 함경도 갑산파 출신이자 당정치위원회 상무위원들인 박금철(당시 민족보위상)과 이효순(당시 대남총국장)을 포함하여 당의 조직, 사상, 문화 분야의 담당자들인 김도만(당시 사상담당 비서) 등이 해당되었다.

 
박금철, 이효순 사건이란?

당시 김정일은 1964년에 문화예술분야에서 당사업을 시작하면서 당조직생활 강화를 통한 문화예술인들의 조직과 사상적 변화를 및 통제를 강화하였다. 특히 문화예술 내용으로 수령위업과 혁명역사 및 위대성을 강조하던 시대였다.

박금철, 이효순은 김일성 권력에 직접적인 도전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일사상체제 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원칙에 의거한 사회발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는 이유로 당과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려는 “부르주아-수정주의분자”들로 낙인찍혀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특히 1967년 박금철은 자신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형상화한 연극 ‘일편단심’이라는 ‘전기’를 제작하고 ‘생가’를 꾸미면서 자신의 활동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김정일은 “누구를 위한 일편단심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점을 포착하였다고 한다.

‘일편단심’은 박금철이 김도만을 시켜 만든 것으로 일제 강점기 자신이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을 때, 자기 부인의 자신에 대한 충성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이다. 이것은 당시 혁명전통의 수립이라는 북한 사회의 지향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은연중에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으로 김정일이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정일은 박금철의 죄상에 대하여 당 인사정책을 무시한 연고주의 인사, 봉건유교사상의 주입, 변절의 경력, 유일사상체계 훼손, 혁명전통의 훼손과 비리 혐의 등을 열거하여 박금철을 숙청하였다.

한편, 이들은 수정주의 경제이론을 유포한 혐의도 받고 있었다. 1970년 김일성의 발언에 의하면, 이들은 정약용의『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에게 필독문헌으로 읽게 했으며, ‘10개년 전망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정주의를 퍼트렸다고 한다(김일성, “간부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며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21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결론, 1979.7.6.),”『김일성저작집 25』(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p.154).

이것은 1960년대 후반에 북한에서 벌어졌던 소위 경제발전에 대한 속도와 균형논쟁으로 표현되는 수정주의 경제이론을 둘러싼 논쟁이다.

당시 갑산파는 ‘균형’을 주장하였지만, 김일성은 ‘속도’를 중심축으로 경제건설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1969년 김일성에 의해 정리되었다(김일성, “사회주의경제의 몇 가지 리론문제에 대하여 (과학교육부문일군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 1969. 3. 1),” 『김일성저작집 22』(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즉, 1962년부터 추진한 국방과 경제건설 병진노선과 1960년대 중반의 경제침체 등으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북한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외적조건으로서 소련의 수정주의, 중국의 교조주의 등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김일성과 갑산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조직사상적 통일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반면, 갑산계는 다원화와 소련과 동유럽에서 실행했던 경제분권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해결대안은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정치, 사상, 조직 문제로 확대되어 사상투쟁을 통해 제거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수령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당-정-군이 유일적 영도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김창봉, 허봉학 사건의 전말은?

김창봉(당시 민족보위상), 허봉학(당시 대남총국장) 사건은 1969년 1월 인민군당 제4기 제4차 전원회의와 확대회의에서 처리된 군부내의 숙청사건을 말한다.

1967년 박금철, 이효순 사건이 처리된 후 민족보위상에 김창봉이 대남총국장에 허봉학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김일성에 대한 과잉충성과 김일성의 동생이자 김정일의 삼촌인 김영주에 대한 불만 등 좌경모험주의 노선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들은 당시 군부내 강경파로서 1967년 이후 군권과 대남사업총국을 장악하면서 대남 사업에서의 성과를 통해 김일성에게 인정을 받고, 나아가 김영주를 밀어내고 자신들이 군사업무와 당의 업무에서 김일성 다음가는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다.

이들은 소위 ‘남조선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라 이름 붙여진 계획에 의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 남조선을 해방하고 김일성의 환갑을 서울에서 지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황일호, “68년부터 추진했던 ‘제2의 6.25’ 작전,”『월간중앙』(1993년 4월호).

당시 김일성의 군 관련 지도방침은 당군사위원회 및 정치위원회를 통해 군을 지도하고, 구체적인 업무는 군사지도부에 일임함으로써 당시 군부는 김일성의 막대한 신임을 얻고 군사 업무에 관한 당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군 수뇌부에서는 김일성의 신임에 편승하여 ‘군사제일주의’가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는 1968년 9월 김영주에 의해 김일성에게 보고되면서 파탄나기 시작했다. 1968년 10월부터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중앙당의 ‘당검열 그루빠’가 집단군, 군단, 사단에 이르기까지 파견되어 2개월 동안 철저히 검열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압박헤 오고 있는 검열을 감지하고 대남사업에서 성과를 내서 이를 만회하겠다는 일념으로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과 1968년 10월의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검열 결과 김창봉 등 군 수뇌부가 호화별장을 지어놓고 방탕한 생활을 한 행위, 특수훈련을 이유로 도당, 군인민위원회 등의 사무소를 습격한 행위, 심지어는 인민위원장을 납치하기까지 한 행위, 마음대로 병사들을 구타 및 고문하거나 강등 조치를 취한 행위 등이 드러났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의 지시와 명령에 불복한 반당 행위까지 드러났다.

이 사건이 김일성에게 있어서 심각했던 이유는 핵심 중추세력인 군에서 당지도부의 거부, 군벌 관료주의의 형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노골적으로 김영주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당권까지 차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적인 당 우위 군사관계를 뒤집어 놓았다는 데서 더욱 심각성이 더 했다.

김일성은 전원회의에서 “..중 략.. 김창봉, 허봉학은 당의 군사로선을 전부 엎어 놓았습니다”라고 비판했다(김일성, ‘인민군 제4기제4차 전원회의시의 김일성 결론 연설(1969. 1. 6-14), 중앙정보부, 『북괴군사전략자료집』(1974), p.330).

이들의 죄상은 당정책 불이행, 군벌관료주의화, 좌경모험주의 군사노선, 반당반혁명 분자라는 것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1967년 수령체계 확립 이후 사회 모든 분야에서 김일성의 수령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수령의 군대화’를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유영구, “북한의 정치-군사관계의 변천과 군내의 정치조직 운영에 관한 연구,”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전략연구』, 1997년 제4권 제3호(통권 제11호), p.80).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 빨치산 제2로군(김창봉)과 제3로군(허봉학) 계열은 몰락하게 되고, 제1로군(김일성) 직계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김일성의 군대화 즉, 김일성 왕조국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이 북한의 최고지도부에게 주었던 충격은 바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이의 공고화에 대한 과제로 나타났다. 이는 곧 후계문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로 나타난 것이다.

즉, 튼튼한 후계체제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2인자를 위한 투쟁과 도전은 언제, 어떻게 제기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최고지도부는 이 사건으로 후계문제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1967년을 지나면서 유일지도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남아 있던 일부 다원적인 요소들마저 사라지고 이후 유일체제에 대한 이견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유일체계의 확립 과정에는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더욱 강화하는 캠페인이 수반되었다. 김일성의 권위가 절대화됨으로써 수령에 대한 찬양이 일체의 공식적인 의식에서 서두를 장식하게 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현지지도라는 이름으로 북한 각지를 돌면서 현지 일꾼 및 대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계속하는 방식으로 대중성을 획득해 나갔다.

이러한 김일성 개인숭배의 배경에는 대내외적인 긴장 속에서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전 사회적인 단결과 결속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이것은 유일사상으로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제기한 상황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결국 북한의 집단주의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개인숭배와 동원의 조직화는 유일체제의 유지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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